바다,

감수성 특수계급의 문제작

by 요인영



다 읽은 책을 무드보드에 담는 이유는 내가 쓰는 글이 리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매우 주관적이며 감각에 치우쳐 있다. 책에서 긷는 것은 온전히 내 세계에만 속한 것이다. 타인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의 긴장을 사유하는 글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행위가 내 세계의 너머 다른 세계의 손 끝을 보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손 끝에 시선을 두는 일은 나를 벗어난 일이기에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기도 한다. 그래서 손쉽게 이미 갖고 있는 낮은 시선 아래에서 책을 읽고, 그래서 책은 손쉽게 쓸모를 다하곤 한다. 어떤 책이 낯설고 어려운 이유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곳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 발을 들였을 때 비로소 무드보드에 담을 수 있다. 물론 무드보드의 본래의 목적에 따라 이 글 또한 끊임없이 수정될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단 하나일 수 있다. 금단 현상의 해소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의 죽음을 겪고 난 후, 간절한 것을 이루고 난 뒤, 사랑을 얻고 잃은 후에 겉으로 보면 똑같아 보이는 내가 똑같은 텍스트를 읽은 다음, 다름을 충격적으로 경험하고, 그 경험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감각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 감각이 '낯설고 어려운 세계'에서 이정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바다>는 고통에 관한 글이다. 어떤 이는 기억과 상실에 관한 글이라 말하고, 혹자는 내용은 없이 겉멋만 잔뜩 든 글이라 말하기도 한다. 내게는 존 밴빌의 '고통의 바다'에 관한 글이다.


고통이 개인에게 압도적으로 크게 다가오는 것은, 생존을 위해 고통의 기억을 강렬하게 각인해 두는 오래된 진화적 메커니즘 때문이다. 우리는 원초적으로 바다와 연결된 감각을 갖고 있다. 독자의 감각은 마치 거울뉴런처럼 작동하여, 소설 속 주인공의 내면을 자신의 것처럼 비춰보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의 기억을 따라가며 공감하는 과정에서, 밴빌이 사용하는 은유는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미술관을 걷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미술관에서는 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물 수 있지만, 소설은 글의 흐름을 따라가야 하기에 독자는 문장에 무한히 머무르기보다는 서사를 따라가려 한다. 그래서 그의 작법이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독자는 마치 텅 빈 전시관 안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감수성에도 특수계급이 존재할까?

바다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끝없는 수평선과 무한한 너울은 각자의 방식으로 감각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 바닷속에 우주보다 더한 깊이가 감춰져 있음을 모른다. 마치 아일랜드 작가들의 문학이 중첩된 시간을 품듯 감수성에도 그런 층이 존재하는 것을 아닐까?

아일랜드의 땅과 바다는 이중의 계급 구조를 가졌다. 그 표면 아래 슬픔과 기억, 갈망을 품은 감수성의 층이 다양한 이름들로 나뉘어 있다. 단순한 울림이 아닌, 누군가만 조우할 수 있는 정교하고 복잡한 감정의 갈래. 그것은 평범한 것이 아닌 오롯이 특수계급의 감수성이다.


그렇다면 이 계급은 무엇으로 구성된 것일까? 그것은 아일랜드의 역사와 불안, 고통과 희망이 만들어 낸 언어의 깊이에서 자란 자들, 그들이 받은 상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삶의 영혼을 품은 자들이다. 그 속에는 고된 시대를 지나온 민족의 슬픔과 혁명, 개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감수성은 그저 감정이 아니라, 선택된 자만이 채집할 수 있는 희귀한 빛과 같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서 바다를 지켜보는 어느 이의 내면처럼 이 특수계급은 세상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바다를 통하여 세상과 교감하고, 계급을 뛰어넘어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쓴다. 그들의 감수성은 전달되고 때로는 부침을 겪으며 오늘도 전 세계의 단 한 명과 관계를 맺는다. 제임스 조이스, 사무엘 베케트, 클레어 키건, 아이리스 머독 그리고 존 밴빌. 그 외 내가 아직 접하지 못한 수많은 아일랜드 작가들.


특수계급의 감수성은 나와 단절된 타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나와 관계를 맺고, 어느 순간 나의 일부가 되어 있다. 내가 글을 읽고 있을 때, 그 글은 단순히 눈앞에 놓인 관상의 대상도, 멀리서 가리키는 표상도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움직이고, 나를 흔들며 나를 변형한다. 독서는 감각의 사건이다. 문장을 따라가며 호흡이 달라지고, 시선이 붙들리고, 잊고 있던 기억이 소환된다. 그때 독자는 단순히 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 그로 인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감수성 특수계급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들의 글은 음식처럼 내화된다. 먹고 삼키고 소화한 끝에 그것은 내 피와 살이 된다. 그들의 문장은 내 언어의 일부가 되고, 내 사고의 리듬을 바꾸며, 내 고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감각하게 만든다. 바로 이 내화의 과정이야말로, 평범한 이가 결코 누리지 못하는 특수계급의 힘이자, 동시에 그들이 독자에게 나눠주는 가장 근본적인 산물이다.




어떤 단어들은 무참히 닳고 닳아 그것 말고는 무엇도 될 수 없는 운명이 되기도 한다. 그런 단어에 숨을 불어넣는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신’은 고전적 이미지로서 너무나 익숙해져 소진된 의미를 갖게 되었지만,

존 밴빌은 첫 문장에 과감히 ‘신’을 쓴다.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


‘신들’ 앞에 ‘그들’을 접두사처럼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살려낸 것이다. 신을 추상적, 비인칭적 존재에서 구체적으로 전환한다. 이로 인해 ‘신’은 전능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한 때 머물렀다 떠난 실체적 타자이자, 화자의 개인적 기억, 상실의 대상이 된다. 밴빌은 이처럼 죽어버린 언어의 경계 너머에서, 서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오직 감각만으로 견고한 세계를 세운다. 익숙한 단어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다시 살아나는 순간, 독자는 넋을 잃는다. 이 예측 불가능성, '소진된 언어를 되살려 낯설게 만드는 힘'이 바로 밴빌의 첫 문장이 갖는 전율이다.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그들의 오만함. 외투처럼 두른 권위와 거부할 수 없는 권능.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 그 악의.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 이기적인, 자기도취, 세상을 보는 오만한 시선, 시선 안에 담긴 상대에 대한 무심함. 자기 중심성은 웜홀의 되어 무엇이든 집어삼킨다. 작가의 작은 괴물들. 클로이와 마일스.



스크린샷 2025-09-08 152857.png Jamie Wyeth, Study for Sleepwalker, AI



그의 시더스, 그의 클로이가 머물던 곳. 시더스는 신들이 잠시 머물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떠난 곳이다.


맥스는 아내인 애나가 죽은 후 과거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십 수년 전의 미제사건이 그의 뇌리에 항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맥스가 찾으려 하는 것은 기억의 일부이다. 어린 시절 맥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었다. ‘초자연적인 것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알려진 것이 다른 형태로 돌아온 것, 유령이 된 것’이라 표현하며, 당시의 의문을 풀고자 과거의 장소로 돌아온다.


유령을 만나러, 유령이 되어.


주인공의 감정은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묘사되며, 그의 시선은 관찰자의 카메라 렌즈처럼 은밀하다. 그러면서 독자와 대화를 시도하는 가련함까지 보인다. 독백인지, 대화의 시도인지는 모호하다. 독자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이를 다르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주인공 내면의 불확실함과 감정적 동요를 반영하는 장치로 읽을 수 있다.


밴빌은 이런 방식으로 스쳐 지나갈 일상의 조각들을 섬세하게 붙잡아 시적 언어로 기술한다. 그의 문장은 평범한 사물을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의미와 감각의 중첩된 상징으로 바꿔 놓는다.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시각적일 뿐 아니라 촉각과 후각을 모두 자극한다. 바로 이 다층적 감각의 결합이 밴빌 문체의 관능성을 형성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보나르의 <자화상>은 맥스를 비추는 거울로서 기능한다.

보나르의 그림은 노년의 자신을 마주하면서 내면의 상실과 모호함, ‘유령 같은 존재’로 느끼는 자기 인식을 나타낸다. 이때 자화상은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살아 있으나 이미 소멸을 예감하는 존재의 초상을 제시한다. 밴빌은 글 초반부터 무덤을 언급하며 자신이 이미 '죽은 현재'를 살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과거를 피난처이자 위안처로 삼으며, 진정한 삶을 ‘투쟁과 긍정’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아늑한 은둔'을 갈구하는 자신을 깨닫고 놀라기도 한다. 여기서 과거는 ‘은둔’과 ‘숨는 곳’으로 현실의 차가움과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는 과거가 결국 ‘지나간 현재’ 임을 인정하며, 그 안에서 자신이 유령처럼 존재함을 자각하는 것이다.



보나르 자화상.png Pierre Bonnard, Self-portrait in the mirror of the bathroom



신들이 떠나간 바다 앞에서 어린 맥스는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빼앗긴 세계 속에서 그는 상실의 의미를 해석할 언어조차 갖지 못한 채, 그저 부재의 공허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사고는 단 한 시점에 일어났지만, 맥스는 인생 전반에 걸쳐 그 사건의 늪에 서서히 빠져든다. 이 지속적인 트라우마는 곧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초래하는 불쾌"로 이어진다. 그것은 단순한 죽음의 두려움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하게 다가오는 경험이며, 자기 존재의 무게에 대한 근원적 혐오로 변해간다. 결국 맥스는 스스로를 지워가는 방식으로 삶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은둔과 무기력, 그리고 자기 존재의 흐릿함으로.

이것이 소설 속 자화상이 갖는 의미일 수 있다.






덧붙이는 말.

길 끝에서 내가 마주할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이미 소멸을 향해 가는 소설 속 유령 같은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살아온 시간의 결을 품은, 사라지면서도 여전히 남아 있으려는 미련 가득한 얼굴일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화상 속에서 '사라짐과 남음 사이'의 존재로 서 있을까요?


"왜 당신 자신이 되려 하지 않아?"라는 소설 속 애나의 외침에 발끈하는 수많은 맥스와 '존재가 과잉'이라 그 불쾌를 감당할 수 없는 삶 속에서 찾아야 할 균형점은 어디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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