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를 대하는 독자의 자세

by 요인영



'시는 어렵다.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시와의 첫인상은 보통 이렇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와 비슷한 상황이랄까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자락 시 속이 더 알기 어려운 것이지요. 끓어오를 듯 말 듯 표면에 이는 감정은 어렴풋이나마 느껴집니다.


그러나 낙엽무지로 깊숙이 끌려 들어가고야 마는.

기발한 기지의 덫으로 우리를 유인하고야 마는.

나는 한 겹 문장에 우쭐하다 한 발 깊어지면 낙담하는 한낱 독자입니다.


날개 다친 잠자리가 편지처럼 날아듭니다. 나는 한쪽 날개를 파르르 떨며 날지 못하는 잠자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바라만 봅니다.


시를 도마 위에 올려두고 구조와 기호로 분석하는 순간 생명이 꺼져가는 낯선 생명체를 보게 됩니다. 필요한 일일수도 있겠으나 빛이 다하는 순간을 들여다보는 일은 슬픔보다는 두려움이지 않을까요. 역사를 담고 사회를 담았다면 독자는 그것을 분명히 느낄 겁니다. 읽는 순간 시간의 좌표가 수정되며 우리를 그곳에 떨어뜨려 놓으니까요. 알 수 없지만 눈앞이 흐려지고 가슴이 먹먹해진다면 그 시는 제 할 일을 다 한 것이죠. 시에서 심리와 신화는 떼려야 뗄 수 없지만 그 또한 독자의 몫은 아닙니다. 읽는 순간 그 시를 손에서 놓을 수 없다면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예리하게 간파당한 어떤 순간이 날개 다친 잠자리처럼 눈앞에 놓여 있을 겁니다. 이미 떨어진 잠자리의 날개를 고칠 수 없듯이 나의 지난날의 상처를 되돌릴 순 없지만 시는 유능한 의사처럼 때론 상담가처럼 마음을 위로해 줍니다.



Rene Magritt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9



대상은 이미 시인에 의해 해체되어 존재의 다른 의미를 획득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지금 눈앞에 놓인 것은 낯설지만 그래서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인 것이죠. 이미 언어의 세계에 있지만 늘 충분하지 않습니다. 전 그것이 고통스럽습니다. 언어를 배우기 전 상태로 돌아가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답답한 것은 언어가 금지와 동의어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정해진 틀 안에 가둡니다.


언어는 표현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금지의 장치입니다.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다른 무언가를 말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명명한다는 것”은 가능성을 잘라내는 행위입니다. 꽃을 꽃이라 부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어떤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잘려나간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그리움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나는 언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는 감옥이지만 동시에 내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다리입니다. 금지와 구속을 넘어서는 방법은 언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균열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언어의 가장자리를 흔들고, 의미의 파편들을 배치하고, 낯선 결합을 시도하는 것. 시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이 긴장 속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언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의심하고 그것을 쓰면서 동시에 그것을 깨뜨리는 일. 아마도 인간이 언어적 존재라는 사실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지만 그 운명을 자각하고 불편하게 사는 것, 그것이 오히려 존재의 다른 가능성에 닿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다 이 시집을 만나게 됩니다. 나희덕 시인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Joseph Kosuth, 하나이자 셋인 의자, 1965


모든 심오한 것은 어떤 가면을 쓰고 있어요. 쉽게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죠. 어쩌면 이해받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쉽사리 파악되는 오욕을 견딜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이 시는 이렇게 쓰였어.' 하고 판단되는 순간 시는 한 걸음 물러서 '그건 내가 아니야.'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시의 가면은 그렇게 필사적으로 써집니다.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그 비틀어 열린 틈 사이에서 감정을 끌어냅니다. 파괴하여 동시에 새로운 가치와 세계관을 만드는 것이죠. 삶을 너무나 진지하게 보는 그들은 삶이 아파서 자신의 아픔은 차마 돌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시인은 자신들의 삶을 예술판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난해하고 난감하며 때론 난잡하여 저런 삶이라면 놉! 할 것 같은 삶을 산 시인도 있지요. 삶 자체를 놀이판으로 갖고 노는 시인을 본 적 있나요?


‘극단적’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radical’이라고 합니다. ‘radical’의 어원은 라틴어 ‘radix’에서 유래하는데, ‘뿌리’를 뜻합니다. 극단적이 되라는 말은 어떤 문제를 볼 때 그 뿌리까지 파고들라는 뜻입니다. 제게 시인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불화하는 말들>에서 이런 글을 적습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피상적인 사고밖에 안 나와요. 예술은 불화에서 나와요. 불화는 젊음의 특성이지요. 우리가 할 일은 자기와 불화하고, 세상과 불화하고 오직 시 하고만 화해하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헐벗게 하고 무시무시한 아름다움을 안겨다 줄 거예요.

작가는 모국어에 균열을 내는 사람이라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소수자이고 이방인이에요.


사고의 전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은 어디에 적용해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뭐든 뒤집는 걸 좋아합니다. 섞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고, 관계없는 것들과 연관 짓는 것을요.





‘나부끼는 황홀 대신 棺이 되기를 바라는’, ‘입김을 불어넣어 피어날까 두려운 마음’은 어떤 것인지. 우리는 활짝 피어나 꽃이 되고 싶지 관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 시를 읽을 당시에 새로 태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중이었습니다.


이 시구는 어떤가요.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저는 책장을 열어 읽는 순간부터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내 이야기 같고, 나의 마음 같아서 쉽사리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이 얇은 시집을 읽는데, 3개월이란 시간이 걸렸어요.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시인은 죽은 자와 이미 사장된 언어를 불러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일까요. 물거품은 어느 곳에도 편입되지 못한 혼돈의 파편입니다. 잡히지 않고 없앨 수도 없는 포섭할 수 없는 것임에도 시인은 '그것만 내 것이 되어준다면 이 것을 완성할 수 있을 거야.'라는 환상을 강렬히 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시의 언어가 되어준다면 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 상관없는 것인지요.


시인의 물거품을 본 저는 인어조차 될 수 없는 불행한 인간이 된 기분입니다. 호흡연습을 핑계로 자꾸자꾸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은 물에서는 자유로울 것이라는 환상 때문입니다.


그토록 목이 마른 것은
당신 안의 물고기가 물 밖에 있기 때문
하지만 당신은 끝내 기억해내지 못하는군요

아가미와 지느러미의 시절을


시간과 공간을 다른 단어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약속되지 않은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저항에 부딪혀 혁명이라는 불꽃을 피우지만, 시인은 획기적인 방법으로 시간과 공간을 그렸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
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

이 남아도는 나를 어찌해야 할까
더 이상 너의 시간 속에 살지 않게 된 나를

마흔일곱, 오후 네시.
주문하지 않았으나 오늘 내게로 배달된 이 시간을




나는 여전히 언어의 한계 속에 머물지만 그 한계 덕분에 시와 마주합니다. 전체보다는 무한을 보려 하는 시인의 시선이 좋고, 그 열린 마음을 사랑합니다. 시 앞에서 나는 언제나 부끄럽고, 언제나 발가벗겨집니다. 시는 내가 숨기려는 것을 드러내고, 내가 잊으려는 것을 불러내며, 내가 도달하지 못한 세계를 먼저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시를 읽는 일은, 곧 시에게 나를 읽히는 일이기도 하다.





흑은 다시 백을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다가
붉은 벽돌집 앞에 멈추었다
백은 알고 있었다 이번엔 문이 될 차례라는 것을
백은 붉은 벽의 일부가 되었다
흑은 백의 손잡이를 아주 천천히 잡아당겼다

-<흑과 백>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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