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과자의 집

by 요인영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시간을 좋아했다. 특히 전래동화를 읽을 때는 아이보다 내가 더 신이 났다. 리듬감이 있고 대화가 입체적이며 통통 튀는 것이 읽는 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또 아이가 읽을 책을 고르다 나도 모르게 아름다운 삽화에 이끌렸다. 많은 예술가들이 동화의 환상을 입체적으로 재현해내고 있었다. 그중 앤서니 브라운이 삽화를 그린 <헨젤과 그레텔>은 나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곤 했다. 아이가 잠든 후 나의 상상은 다른 곳으로 흘렀다.





헨젤과 그레텔은 고전 동화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이고 잔인한 서사를 품고 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버려진다는 설정만으로도 이미 현실의 잔혹함이 드러나는데, 브라운은 이를 사실적인 이미지로 더욱 선명하게 표현한다. 아이들을 버리자고 종용하는 새엄마, 무력하게 바라볼 뿐인 아버지의 모습은 인간을 잡아먹는 마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부모가 오히려 위협이 되면서 가정은 아이들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아니라 가장 큰 불안의 근원이 된다.

숲 속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은 굶주림 끝에 환상을 본다. 과자와 사탕으로 지어진 집은 달콤하지만 자유롭게 먹을 수도 머물 수도 없는 또 다른 감옥일 뿐이다. 이 집에 사는 마녀는 아이들을 억압하는 또 다른 존재다. 흥미로운 것은 마녀는 눈이 멀어 아이들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녀가 아이가 만들어낸 불안과 공포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 이야기의 전환점은 그레텔의 선택의 순간 찾아온다. 마녀를 화덕 속에 밀어 넣음으로써 두려움의 대상을 스스로 끊어내는 것인데, 그레텔이 선택한 길은 단순히 오빠를 구하는 행동을 넘어 아이로서의 무기력함을 벗어나는 행위다. 반면 헨젤은 조약돌이나 빵 부스러기를 흩뿌리며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 길은 항상 사라지거나 막힌다. 현실을 회피하며 과거로 돌아가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이다. 반대로 그레텔이 만들어 낸 길은 다르다. 그녀는 두려움을 직면하고 마녀를 없앰으로써 새로운 길을 연다. 그 길은 조약돌처럼 허술하지 않고, 빵 부스러기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무지개가 떠 있는 호수 위, 백조가 아이들을 태워 건네는 길은 그레텔이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 낸 새로운 가능성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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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화는 단순히 아이들이 모험담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과 두려움 속에서 길을 잃는 인간의 심리를 비추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두려움과 맞서 싸울 때만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새엄마와 마녀는 외부의 악이 아니라, 아이들 내면의 불안과 공포가 형상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마녀가 사라진 후 아이들 곁에 남는 이는 단 한 사람 무기력하게 실제 하는 아버지다. 현실은 여전히 완전하지 않지만 두려움을 넘어선 순간 새로운 세상은 열린다.

헨젤과 그레텔은 아이들의 성장 서사이며, 동시에 우리가 어둠 속에서 어떻게 길을 만들어 가야 하는지 묻는 이야기다.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삶의 비극과 인간 내면의 진실이 감춰져 있다. 그레텔이 보여준 용기는 바로 그 진실과 마주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한다.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새엄마가 떠난 집에서 아빠 홀로 두 아이를 맞이한다. 아이를 학대하고 버린 것이 정말 새엄마였을까? 새엄마와 마녀는 아이들이 자신을 버린 아빠를 용서하기 위한 심리적인 장치가 아니었을까.





동네의 맨 끝 집. 엄마에게 이끌려 찾아간 곳은 ‘마녀’라 불리는 노파의 집이었다. 쌍둥이들은 꼭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그들은 살기로, 살아남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동화 각색


존재와 기억, 그리고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와 그림 동화의 교차점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으며 끊임없이 마음에 맴돈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 책장은 거침없이 넘어가지만 머릿속에서는 내내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 이유는 작품의 내러티브가 내게 그림형제의 동화를 계속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헨젤과 그레텔>이 겹쳐 보였다.


초기 그림동화는 현실을 가감 없이 반영했다. 잔혹한 장면, 배신과 굶주림, 그리고 아이들의 절망은 당시 유럽 민중이 겪던 폭력성과 사회적 어두움을 보여주는 기록이었다. 헨젤과 그레텔에서 새엄마와 마녀는 부모의 배신과 사회적 무능의 투사물이다. 아이들은 빵조각과 조약돌이라는 불안한 흔적에 의지해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 여정은 이미 실패를 내포한 환상에 가깝다. 이 동화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으로, 인간의 생존 본능과 가족의 해체, 사회 구조의 냉혹한 현실을 드러내는 역사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으면 소설 속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처럼 다가온다. 쌍둥이는 단순히 두 명의 인물이 아니라 분열된 자아의 투사물이다. 선택적으로 기억을 재구성하고 때로는 진실을 왜곡하거나 삭제하는 인간의 본능이 쌍둥이라는 형식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결국 소설 속 쌍둥이 역시 고향과 가족, 정체성에 대한 기억을 집요하게 붙잡지만 그것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하다. 이는 헨젤의 빵조각과 다르지 않게 귀환을 예견된 실패로 만든다.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경계의 끝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악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몸과 정신을 단련하기 위해 서로를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감정을 나타내는 모호한 문장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실만을 묘사한 비밀노트를 만들었다.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동화 각색


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이런 이야기를 써야만 했을까? 그 답은 작가가 살았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은 소련의 지배에 저항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었다. 그러나 결국 무력 진압으로 끝났고, 약 20만 명이 해외로 망명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아고타 크리스토프였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했고, 새로운 언어와 낯선 삶 속에서 단절과 소외를 경험해야 했다. 전쟁의 과거, 망명자의 현재, 불확실한 미래가 교차하는 시간 구조는 그녀의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품의 시간은 직선적이지 않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진실과 거짓이 교차한다. 이는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망명자의 삶 자체가 반영된 구조이다. 기억은 단편화되고, 반복되며, 때로는 삭제된다. 바로 그 파편화된 시간의 감각이 작품 속 서술을 지배한다.


크리스토프가 삼부작 집필에 30년을 준비했다고 밝힌 사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녀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려 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망명자로서 분열된 정체성과 존재의 불안,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사유한 끝에 문학적 형상화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은 역사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결국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이 절망의 숲에서 길을 찾으려 했듯 크리스토프의 '쌍둥이'도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조약돌이 빵조각이 되어 흩어지듯 기억과 정체성 역시 언제든 무너지고 지워질 수 있다. 바로 그 불완전성과 실패의 예감 속에서 작가는 인간의 실존을 가장 날카롭게 드러낸다.


엄마의 품을 가져본 적 없는 루카스는 나이가 많은 여인 클라라를 연인으로 삼았다. 그녀와 처음 몸을 섞던 순간, 클라라의 몸에서 붉은 것이 새어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마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듯 흘러나온 피였다. 그 순간 루카스에게 클라라는 연인이자 처음으로 맞이한 어머니의 형상이 되었다.

-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일부 각색



머릿속에서 지속적으로 울리던 불쾌한 마찰음은 가볍게 읽어 넘길 소설이 아님을 알려주긴 위한 경고음이었다. 작가에게 세상은 '소설 속 세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작가가 쌍둥이를 분리해내는 방식이 무척 정교하고 세련되게 느껴진다. 부모의 죽음을 단순한 사건으로 소비하지 않고, 이야기의 구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극적 긴장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배치한다. 쌍둥이는 끝내 침묵과 무표정을 지키며, 먼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스크린 너머로 바라보듯 냉정한 시선으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들의 침묵을 더욱 단단하게 봉인하고, 아버지의 죽음은 서로를 분리시켜 독립된 존재로 세우는 선택의 순간으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분리의 방식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잔혹하면서도 필연적인 성장의 의식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아빠는 두 번째 철조망 직전에 쓰러져 있다. 그렇다.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를 앞서게 하는 것이다. 마대를 쥐고, 앞서 간 발자국을 따라간 다음, 아빠의 축 늘어진 몸뚱이를 밟고, 우리 가운데 하나만 국경을 넘어갔다. 남은 하나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p.207


1부에서 이름 없이 대명사로만 불리던 인물들이 이름을 갖자 입을 열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제인 <타인의 증거>는 쌍둥이 중 한 명인 루카스가 지역사회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법적,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기록자이기에 붙여진 제목이다. '루카스'는 이름을 가진 다른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자이다. 1부의 끝에서 그는 그 자리에 남고 클라우스는 떠난다. 이 남음과 떠남은 단순한 물리적 분리를 넘어 내적 세계의 재편을 보여준다. 쌍둥이는 1부에서 잔인하고 비상식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 2부에서는 사회 속에서 정상적인 인간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마치 그의 어둠과 과격함은 클라우스에게 전부 남겨진 듯한 모습으로.


루카스는 서른 살에 도시에서 모습을 감췄다가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데, 돌아온 그는 루카스의 모습을 한 '클라우스'였다. 루카스는 여러 명의 죽음을 순차적으로 목격하고 사라지기 마지막 순간에 목숨처럼 아꼈던 아이 마티아스의 죽음을 목격한다. 충격을 받을 때마다 기절하는 그는 정신을 차리면 모든 기억을 잃는데 미티아스가 죽은 후에 그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가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형제, 클라우스라는 이름의 망령이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사라짐으로써 증명되는 존재였다. 루카스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기억할 수 없을 때, 오히려 타인의 형상을 빌려 자기 존재를 연명했다. 이는 곧 '타인의 증거'라는 아이러니한 방식으로만 이어지는 삶의 증언이었다.


제3부 <50년간의 고독>에서 드러나듯 남겨진 존재는 기억의 주체가 아니라 망각의 그늘에 기입된 이름 없는 목격자에 불과하다. 50년간의 고독은 루카스의 시간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목소리들의 시간이며 남겨진 기록의 고독이다. 루카스가 클라우스를 떠올린 방식은 곧 자기 자신을 하나의 타인으로 전치시키는 행위였다. 그는 끝내 나라는 주체로 증명되지 못한 채 타인의 이름으로만 남겨진 자, 타인의 증거로만 남겨진 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루카스가 클라우스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자기 소멸의 증거이자 고독의 절정이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순간, 오직 타인의 그림자로만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다. 결국 존재의 증거란 자기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에 의해 남겨지는 것임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덧불이는 말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거짓말은 본문에 언급됩니다. 그러나 밝힌 것 또한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수 없어요. 이 모호함이 소설의 본질인 것 같습니다. 즉 거짓말이 언급되는 순간에도 그것은 진실일 수 있고, 진실을 말하는 순간에도 그것은 거짓이 되니까요.


형식만 보고 가벼운 책인 줄 알았다가 큰 코 다친 소설입니다. 브런치 작가님들은 이 소설 많이 보셨을 텐데, 어찌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anthony-tran-GVSoj-FO5LM-unsplash.jpg anthony tran/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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