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떤 사람은 침묵을 향해 떠나는가?
책은 취향이 분명해서 선물하기가 쉽지 않다. 나는 책 선물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지인에게 건넬 때마다 번번이 빗나간다. "고마워." "잘 읽을게." "마침 궁금했던 책이었어." 고맙고 예의 바른말들이 오가지만 그 책이 그들의 책장이 아닌 마음속에 꽂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과제 검사하듯 "다 읽었어?"하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람도 책과 비슷하다.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 평하는 이가 나에게도 좋은 사람일 거라 기대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유머코드도 엇갈리고, 삶을 대하는 방식조차 다르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 건 분명하지만 나와 잘 맞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억지로 맞추려 하면 오히려 모서리가 더 선명해진다. 읽히지 않는 책을 책장 속에 꽂아두듯 나와 맞지 않는 사람도 그저 마음 한편에 두기로 한다. '나쁜 책'이 아니듯 '나쁜 사람'도 아니다. 다만 내 시간과 감정의 페이지를 넘기기에는 힘이 드는 책일 뿐이다. 나이 들수록 알게 된다. 모든 책을 읽을 수 없고 모든 사람과 가까워질 필요도 없다는 걸. 중요한 건 어떤 책과 어떤 사람을 곁에 오래 두고 싶은지 스스로 아는 것이다.
새라 메이틀랜드의 <침묵의 책>은 내게 그런 책이다. 황무지에서 숲으로, 숲에서 사막으로. 작가는 망설임 없이 침묵을 향해 걸어간다. 길 위에서 마주한 자연과 시간, 그리고 그 속에서 길어 올린 사유들이 차곡차곡 쌓여 소리 없는 풍경 속으로 이끄는 것이다.
무엇보다 신기한 점은 내가 침묵에 대한 경험을 말하려고 하면, 심지어 나를 사랑하기에 얘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침묵에 대해 이론을 제시하거나 설명하거나 묘사하려 하면 침묵 자체가 이를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침묵이 ‘아무 의미 없기’때문이 아니다. 침묵이 ‘언어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p.53
검은 우주 속의 침묵, 그리고 부서진 생각
“내게는 좁은 방이 아니라,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가 필요하다.” 새라 메이틀랜드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 황무지를 곧바로 상상하지 못했다. 나에겐 황무지 대신, 손 안의 펜과 종이 그리고 그 순간만 있으면 족했으니깐. 글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번쩍이는 순간의 낙하에서 시작된다. 생각은 비처럼 떨어지고, 나는 그것을 받아 적는다. 한 번 놓친 빗방울은 결코 같은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비슷한 모양의 물방울이 손바닥에 고일 수는 있지만 그건 이미 다른 시간의 물이다.
책을 읽는 순간, 내 생각은 부서진다. 커피콩이 그라인더 속에서 조각나는 것처럼.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생각은 모양이 다르다. 읽기 전의 생각은 아직 단단하고, 향이 갇혀 있다. 읽고 난 뒤의 생각은 잘게 부서져 공기와 닿으며 산패를 시작한다. 나는 그 부서진 생각을 되돌리려 애쓰지만 이미 시간의 기류 속에서 맛이 변한다. 결국 남은 건 물줄기에 실려 흘러가는 가루 같은 파편이다. 주전자 주둥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침묵의 책> 속 침묵은 검정처럼 보인다. 빛을 흡수해 자신 안에 가두는 색, '무'이자 동시에 만물의 기원을 품고 있는 색. 하지만 그 검정은 결코 하나의 층위에 머물지 않는다. 깊은 심연의 고요를 닮은 검정, 흐릿한 경계를 품은 회색, 밤의 호흡을 닮은 짙은 파랑, 그리고 소리가 닿기 전의 순백. 책 속의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무채색 스펙트럼의 변주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침묵을 말하면서도 꽤 시끄럽다. 역사와 종교, 신화와 과학, 작가의 개인적 고백이 뒤섞여 있다. 그것은 마치 무한한 별을 품은 우주가 스스로를 비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침묵을 소유하거나 정의하겠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침묵을 둘러싼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며 독자 스스로 그 빈자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유도한다.
‘극단적인 삶의 방식이 극단적인 경험을 안겨준다는 생각, 그것이 가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p.60
이 말은 황무지와 같은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완전한 불꽃’이 되고 싶은 한 인간의 염원임을 말한다. 작가가 침묵을 택한 데에는 네 가지 의식적인 목적이 있었다.
첫째, 침묵이 단순히 부정적인 부재나 상실이 아님을 반드시 깨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님을 자신에게 입증하기 위해서. 둘째 자신의 영성을 더 깊이 탐험하며 신의 존재와 연결될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서. 셋째 더 깊은 글쓰기를 위해. 이십 년 넘게 안정적으로 이어온 서사에 자신이 없어졌고, 시대가 주류에서 벗어난 것을 결핍으로 규정하려는 흐름에 맞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단순히 그동안 누린 침묵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저자는 침묵을 지적, 감정적, 신체적으로 다양하게 즐기고 위해서라고 쓰고 있다.
메이틀랜드는 먼저 역사의 무대에서 침묵을 불러낸다. 수도원과 사막 교부들의 고독, 성인들이 택한 자발적 침묵의 전통, 전쟁과 탄압 속에서 강요된 침묵의 장면들까지. 침묵은 때로 권력의 폭력 앞에서 침묵당한 목소리였고, 때로는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스스로 걸어 들어간 고요였다.
물에 비친 상은 마법처럼 고요하다. 상(reflection)이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가 그 마법을 더욱 배가시킨다. 나는 물에 고요히 비치는 별의 상에 대해, 저 깊은 곳에서 나타난 잠자리 상이 대기와 물이라는 두 세계 사이의 얇은 거죽인 수면 위를 스치듯 지나가는 실제 잠자리를 만나는 광경에 대해 침묵 속에 곰곰이 생각했다. p.457
아침과 저녁이 오고 갔고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갔다. 고요한 대위법 같았다. 이들은 아름다운 리듬을 만들어냈고, 기분 좋은 날이면 나는 그 안에서 내가 탐험하고 싶어 했던 기도와 글쓰기라는 이중의 침묵에 대한 하나의 모델을, 이미지를 감지할 수 있었다. p458
종교 속 침묵은 신과 인간 사이의 언어 이전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기독교의 ‘광야의 침묵’, 불교의 참선, 수피즘의 내적 청취, 그리고 토착 신앙에서의 침묵 의례까지,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이 침묵을 ‘신성한 통로’로 여긴다. 메이틀랜드에게 침묵은 신앙의 목적지가 아니라 신앙을 지속시키는 공기 같은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공공장소에서도 ‘사적’이다. 기차 안에서 책을 읽는 사람의 어깨너머로 머리를 기울여 그 책을 같이 읽으려 하는 행동은 무례하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대화는 부끄러움 없이 마음껏 듣고 끼어든다. 이런 사적인 경험 속에서 독자는 텍스트를 새로운 방식으로 소유한다. 텍스트를 체제 전복적으로 은밀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묵독은 개인적이거나 독립적인 사고로 이어졌다. p.262
침묵은 우선 개인을 ‘다른’ 장소에 데려다 놓고, 그다음 그가 어떤 간섭이나 지적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이들 기억을 되찾고 구체화할 기억을 준다. p.414
그리고 그녀는 과학의 눈으로 본 침묵에도 시선을 돌린다. 깊은 심해와 우주 공간에서의 무음, 인간의 청각이 감지할 수 있는 한계, 절대적인 무음이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 침묵은 단순히 ‘아무 소리 없는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들어온 세계의 구조와 감각의 한계를 비추는 실험실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구의 대기권 안에서 진정으로 완전한 침묵이란 사실상 절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런 각기 다른 침묵이 각기 다른 정서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순전히 청각적인 경험을 넘어가면 범위는 더욱 방대해진다. 정서적으로 다른 침묵이 있고 지적으로 다른 침묵도 있다. 나는 소리가 주로 뇌의 현상인 반면 침묵은 마음의 일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p.324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런 소리가 있다는 데 동의했다. 아주 작은 소리가 지속적으로 들리며, 케이지가 정확히 설명했듯 두 개 이상의 음조가 들린다는 것이다. 이런 소리는 아주 극심한 물리적 침묵의 순간에만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도 정확히 알지는 못하는 듯했다. 신의 목소리, 귓속에 갇힌 미립자의 소리.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많은 소음을 만들어 낸 탓에 인간의 소리가 죽어가는 마지막 잔향에서 달아날 수 없기에 나타난 결과. 우주가 회전하는 소리, 땅속 깊이 지질구조판이 손톱이 자라는 속도로 서서히 기어가는 소리. 나는 이 소리를 시나이 사막에서 처음 접했지만 그런 기이한 상황은 충분히 깊은 침묵과 잔잔한 대기, 그리고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쩐지 가슴 떨린다. p.344
침묵의 경험 중 인상 깊었던 것은 어느 연주자의 공연에서였다. 다니엘 트리포노프는 앙코르곡으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연주한다. 박수가 잦아들고 관객들은 숨죽인 채 연주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1분이 흐르고, 디시 또 1분이 흘렀다. 객석의 숨소리가 조금씩 무거워지고 누군가의 옷깃 스치는 소리마저 과하게 들렸다. 그러나 트리포노프는 피아노 앞에서 악보를 넘기는 손짓을 빼고는 완벽히 고정된 조각상처럼 있었다. 그도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관객과 연주자가 나눈 4분 33초. 이것이 트리포노프의 앙코르곡이었다.
책을 덮고 나면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생각이 너무 작아져서 잡히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작아진 조각들을 가만히 물 위에 띄워 흘려보내는 일뿐이다. 4분 33초를 흘려보내고 난 후에도 같은 반응이었다. 사실 이 곡은 <침묵의 책>에서 작가가 다룬다. 사전 정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메이틀랜드가 말한 침묵의 들판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모든 것이 잠재하는 공간. 부서진 생각들이 모래알처럼 스며드는 검은 땅. 정의 내릴 수 없는 침묵이 뿌리를 내리고 다음 문장이 자라나는 그런 곳.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그런 일이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흔들어 깨워 그 비밀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알고 싶다. 침묵을 말로 표현하여 소음으로 가득 찬 바깥세상 사람들이 침묵에 다가가 이를 사랑할 수 있게 하고 싶다. 그게 가능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 p.489
덧붙이는 말: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다. 발견한 날 절반을 읽고 안 되겠다 싶어 바로 주문에 들어갔지만 절판. 중고로 판매하는 분이 있어 망설임 없이 구매했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읽어나갔다. 밑줄을 긋고, 스티커를 붙이고, 메모하며 말 그대로 난리브루스를 췄다. 읽다 보니 요즘 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페이지를 한 장 넘길 때마다 한 장씩, 책장이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너덜너덜. 책이 아니라 내 마음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책 삽니다. 단 페이지가 제 발로 걸어 나가지 않는 책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