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우울,

내면과 외면에 간극이 있다면 당신도 우울할 수 있다

by 요인영



무드보드 한 칸에 놓인 한낮의 우울

우울은 다른 어떤 병보다 이해받기 어렵다. 감정적 지원을 받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눈은 감정의 창구이다.

우울을 앓는 이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슬픔이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는 절박함이라면 우울은 굳게 잠긴 투명한 문. 안쪽에는 집주인이 서 있고, 바깥에는 문을 두드리는 내가 있다. 집주인은 문을 열어주려는 기색조차 없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감하게 바라볼 뿐이다.

보이지 않는 절박함은 계속 두드리게 한다. 그러나 절박함이 투명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외면당했다는 감각은 더 깊이 파고든다. 그 표정과 무기력을 병의 증상으로 이해해야 함에도 지켜보는 이는 쉽게 지쳐버린다. 아픈 사람을 이해하는 일의 최전선. 그 자리에 <한낮의 우울>이 놓여 있다.


우울증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관점 자체를 잃게 만든다. p.85


이 책을 왜 읽게 되었는지 기억에 없다. 책의 내용은 부분 부분 사라져도 첫 장을 펼쳐 읽기 시작한 순간은 보통 잘 잊히지 않는다.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니 직장인에서 백수로 전환될 무렵. 어쩌면 강렬하고 우수에 찬 제목에 끌렸을 수도 있다. 혹은 울적했을까? 외근 나갔다가 들어가는 길에 작은 서점에 붙어 있는 추천글이 눈에 띈 것일 수도 있다. 회사로 복귀해야 함에도 잠깐 확인만 하자라는 생각으로 서점에 들어선다. 책은 늘 그런 식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이유 없이 직관적으로. 서점 주인은 "고통의 정반대는 권태 p.35"라는 문장을 이용했을까?



슬픔과 우울은 문학 속에서 다시 정의된다. 저자는 우울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변주를 시도한다. 그 표현이 아름답고 극적이라 지금 그가 쓰는 있는 것이 병증인지 아니면 예술인지 구분이 어려워진다.


마흔이 넘어가면 경증 우울이 감기처럼 온다. 특별한 이유 없이 시절처럼, 날씨처럼 찾아오는 감정의 기복은 안에서든 밖에서든 다스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의 행복은 세속적인 것으로는 살 수 없게 되는데, 그건 단지 호르몬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 그리고 삶의 결까지 변하게 하는 어떤 오래된 흐름이다.


조르주 데 키리코 출발의 불안 1914.png 조르주 데 키리코 <출발의 불안>, 1914


슬픔은 삶의 한 장면에 맞춰오는 손님이다. 장례식의 검은 옷처럼 이별의 비 내음처럼 때에 맞게 찾아오고 때가 되면 돌아간다. 그러나 우울증은 그렇지 않다. 상황에 맞지 않는 슬픔, 계절을 잃은 비처럼 이유 없이 혹은 너무 사소한 이유로 몰려온다. 때로는 아무 이유도 때로는 너무 많은 이유도 그 끝은 같다. 마음은 무겁고 몸은 굳는다.


우울증은 들판에서 뿌리 뽑혀 바람에 굴러다니는 회전초 같다. 대지와의 연결이 끊겼는데도 묘하게 잘 살아남는다. 자양분 없는 척박함 속에서도 오히려 버텨내며 그 고뇌를 키운다. 경미한 우울이라도 그것은 녹이 쇠를 잠식하듯 서서히 사람을 갉아먹는다. 고통은 마음속 다른 모든 감정을 몰아내고 한 때 익숙하던 빛과 온기를 잊게 만든다.


암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하나씩 무너져도 그것은 죽지 않는다. 산소가 모자라고 길이 막히고 온 사방이 폐허가 되어도 마치 스스로를 속이듯 계속해서 자리기만 한다. 죽어야 할 때를 외면하고 멈춰야 할 순간에도 더 멀리 뻗어나가며 마침내 그 자신이 하나의 고집스러운 세계가 된다.


우울은 단순히 나와 분리된 병이 아니다. 그것은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내가 누구인지를 다시 쓰게 한다. 치료란 나를 정상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조각들을 재배열해 새로운 나를 만드는 일이다. 세상은 예전에는 성격이라 불리던 것을 이제 병이라 부른다. 치료제가 나오면 난폭성도 병이 된다. 병과 성격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때로는 의학이 아니라 시장이 그 선을 긋는다. 우울이 깊어지면 현재는 사라진다. 우리는 미래의 고통을 예견하는 시선 속에서만 살게 된다. 아무리 안전한 자리에 서 있어도 균형은 무너지고 지금의 지금은 공허하게 빠져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우울증이 왜 시작되는지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지 왜 어떤 치료가 통하는지 어떤 이는 무사히 지나치는 상황에서 왜 또 다른 이는 무너지는지. 심지어 의지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도.


조르주데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울1914.png 조르주 데 키리코 <거리의 신비와 우울>, 1914


그렇다면 우울은 언제 찾아오는 걸까. 삶의 무대 위에서 우리는 늘 잃어버림과 마주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거나 맡았던 역할에서 밀려나거나 오래 지탱해 온 자아의 틀이 흔들릴 때 그 상실의 공기는 한낮의 햇빛처럼 무겁게 내려앉는다. 때로는 벗어날 수 없는 덫에 걸린 듯한 굴욕이 가장 깊은 우울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러나 삶의 이야기들은 그렇게 단선적이지 않다. 우울이 사건을 불러오는지 사건이 우울을 일으키는지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며 얽히고, 우리는 그 경계를 분명히 가를수 없다. 처음의 우울은 대개 어떤 사건과 나란히 걸어 들어오지만 두 번째, 세 번째를 지나면서 그것은 점점 더 자율적인 존재가 된다. 마침내 네 번째나 다섯 번째쯤 우울은 삶의 풍경과는 무관하게 불쑥 찾아오는 불청객이 된다.


조지 브라운은 말한다.


"우울은 과거의 상실에 대한 응답이고 불안은 미래의 상실에 대한 응답이다."


우리는 이미 사라진 것 앞에서 슬퍼하고 아직 오지 않은 그림자를 두려워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두려움과 슬픔, 희망과 기쁨의 관계를 이야기했듯 불안은 늘 우울의 예고편처럼 우리 곁에 머문다.


케이 제이미슨의 표현처럼 마른 장작 더미 위로 언제든 불똥이 튈 수 있는 풍경이다. 불은 예고 없이 번지고, 장작은 이미 건조해 타오를 준비를 마친 상태다. 몇 번의 화마를 거친 뒤에는 불똥이 떨어지지 않아도 장작 스스로 타오르듯 우리의 뇌 역시 우울을 반복하는 길을 기억해 버린다. 처음에는 사건이 불씨였지만 나중에는 뇌가 스스로 불길을 되살린다.


그러니 우울은 더 이상 한 개인의 나약함이나 일시적 기분으로만 읽을 수 없다. 그것은 상실과 불안 그리고 뇌의 기억이 함께 만들어낸 깊은 심연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불똥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장작을 적셔두는 일일 것이다. 삶이 언제 던질지 모르는 불씨 앞에서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덜 타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 아마 그것이 우리가 우울을 대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일지 모른다.


짓지도 않은 죄를 용서받은 자의
경이감과 쓰라림을 안고
나는 돌아온다.
결혼 생활과 친구들에게로
가두리가 갈라진 분홍 접시꽃에게로
돌아온다.
내 책상과 책들과 의자에게로

제인 케년





시작하면서 제 몸통만 한 고기를 손질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세상에 필독서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필요서가 있을 뿐이죠. 몸통만 한 고기를 해체하는 이유는 먹어서 그 양분으로 하루를 살기 위해서입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필독서라 불리는 책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할 '필요서'가 있을 뿐이지요. 손질한 고기를 조금씩 나누어 먹듯 책에서 건져 올린 한 문장 한 문장이 내 삶을 버티게 합니다.


고기를 손질하는 일은 번거롭고 힘들지만 결국 그것이 내 피와 살이 됩니다. 책을 읽는 일도 그렇습니다. 어떤 책은 손질하기도 전에 비린내가 올라오고 어떤 책은 한 줄 한 줄 해체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지나야만 내 안에 무언가가 쌓입니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에 내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그 시기에 나에게 필요한 책이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것은 내 삶의 허기를 달래기 위한 고기 덩어리 같았고, 나는 그것을 손질하듯 읽어나갔습니다. 왜 하필 이 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나에게는 필요한 양분이었습니다.


앤드류 솔로몬은 우울증이 어려운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라고.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양상으로 드러나지만 내면에서는 제각각 다른 전쟁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각기 다른 우울의 세계에서 엉망인 채 홀로 서 있습니다.


인간의 내부를 임상적으로 해부한 책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한낮의 우울>이 꾸준히 읽히는 이유는 다릅니다. 이 책은 우울증을 개인의 약점으로 축소하지 않고 인간 보편의 고통으로 드러냅니다. 삶과 죽음, 고통과 권태를 한 자리에 펼쳐놓은 철학서에 가깝습니다.


솔로몬은 해법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 방식을 교훈을 주입하는 선생이 아니라 다정하면서도 잔소리를 아끼지 않는 엄마의 모습 같아요. 치료와 약물, 공동체의 지지, 의미의 회복을 말하지만 그것을 강요하지 않고 경험으로 들려줍니다.


만일! 나는 우울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언젠가 소설로 다뤄야겠다, 병증을 문학적이고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싶다, 우울증의 치료 과정과 사례, 진화와 역사에도 관심이 많다, 저자인 앤드류 솔로몬의 뇌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읽어보세요. 달필이라 술술 읽히니 읽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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