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드보드 한 칸에 담긴 책

프롤로그

by 요인영



책이 주는 즐거움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언니의 책상 위에 놓인 <제인 에어> 덕분이었다. 언니가 다 읽고 무심히 두고 간 그 책을 몰래 가져와 펼쳤을 때, 마치 무언인가를 훔치는 듯한 은밀한 설렘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바깥이 서서히 어두워질 때까지 말 그대로 책 속에 빠져들었다. 책장을 펼치고 활자를 따라가는 순간 눈앞에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경험은 인간이 유일하게 권장하는 중독일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한 번쯤 혹은 자주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도서관이나 서점을 돌다가 표지일 수도 특정 단어, 혹은 특별하지 않지만 나를 끌어당기는 감각. 무엇이든 좋다.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이끌려 걸음을 멈추게 된다. 보통 그런 책은 첫 문장부터 매료된다. 인생 책은 그런 우연이 겹쳐 내게 온다. 무드보드 한 칸에 담긴 책들은 이런 우연을 타고 내게 왔다. 책마다 각각의 서사가 있고,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테일러-쿠에트의 실험 장치는 투명한 큰 실린더 안에 작은 실린더가 들어가 있고, 작은 실린더가 큰 실린더 안에서 자유롭게 회전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이다. 큰 실린더와 작은 실린더 사이 공간에는 점성이 높은 투명한 액체가 가득 차 있다. 실험을 위해 작은 실린더를 돌리면 액체도 함께 회전하게 되고, 실린더 표면에 가까운 액체일수록 더 빠르게 움직인다. 이 액체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잉크가 처음엔 뭉쳐 있다가 실린더를 돌릴수록 점점 퍼지면서 보이지 않게 된다. 만약 이 실린더를 반대방향으로 돌린다면 어떻게 될까?


감정과 기억 혹은 연결된 감각이라고 해도 좋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잉크 방울이 액체에 희석되듯 감정은 무뎌지고, 기억은 희미해지고 연결성은 약해진다. 투명한 실린더 안, 액체 속에 떠다니는 잉크 방울 한 점, 시간을 돌리는 손이 실린더를 움직인다. 그 속에서 감정과 기억, 감각은 잉크처럼 퍼져 희미해진다. 마치 사라진 듯하지만 실은 우리 안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실린더를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돌리면 퍼졌던 잉크가 다시 원래처럼 하나의 방울로 모이게 된다. 잉크 입자가 완전히 섞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가 움직임을 되돌리면 분리되어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삶의 흐름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며 흩어진 감정과 기억들이 다시 모여 선명한 형태로 되살아남을 경험한다. 잉크 방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우리 안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 드러나길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숨어 있던 흔적을 느끼며 내면 깊은 곳의 진실과 다시 마주한다. 책과의 우연한 조우 그리고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겪게 되는 감정의 변화는 연결되어 있으나 보이지 않던 감각이다. 인생 책은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감각을 타고 조용히 다가온다. 어느 날 문득 나를 도서관의 그곳으로 이끈다.


anhelina-osaulenko-2ym7_a5nGZw-unsplash.jpg anhelina-osaulenko/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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