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재생되는 일회성
그는 이 이미지에서 탄생했다.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p.361
쿤데라의 토마시가 벽을 보며 탄생하듯이, 나의 토마시는 코트 속에서 나타났다. 강보에 싸인 아기 같은 격렬한 무거움의 탄생의 순간에 토마시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다. 이제 가벼운 삶이 끝장났음을.
인간은 그렇게 무거움이라는 나쁜 감정에 중독된다.
코트 속에서
헐렁하지도 지나치게 몸에 맞지도 않았다. 코트는 그의 어깨 위에서 마치 수면 위를 떠다니는 듯 자유롭게 미끄러졌다. 그의 어깨선은 어딘가에 붙잡히지 않고 유연하게 흐르는 물결 같았다. 옷이 그의 몸에 얹히는 방식은 그가 현실의 무게나 형태에 영원히 정박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는 옷이 만들어내는 규격화된 경계를 가볍게 넘어 다니는 존재, 즉 가벼움 그 자체였다.
그러나
강보에 싸인, 곧 울음을 터뜨릴 듯, 꾸르륵 거리는 소리에서 태어난 그의 욕망은 그가 최초로 경험한 무거움에 대한 감각이었다. 강보에 싸인 아기는 토마시가 느낀 최초의 욕망이자 무거움이었다.
편두통 안에서
지독한 편두통의 한가운데서, 혹은 짐승 같은 구역질과 함께, 그녀의 내면에서부터 존재의 불가피성이 끓어올랐다. 테레자가 최초로 경험한 것은 ‘있음’의 필연적인 무게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었다. 강보에 싸인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압도당하는듯한 그 고통스러운 감각은 테레자가 세상에 던져진 순간부터 짊어진 고독과 헌신의 무거움이었다.
진짜 무게는 거기서부터였다.
그녀는 자신을 낳은 여인의 몸을 통해 세상을 마주했다. 살덩이와 배설, 그리고 숭고함 없는 육체만이 존재하는 그 음침한 원(原)의 풍경. ‘우리는 모두 똥입니다.’라고 조롱하며, 모든 개별성과 아름다움을 여성의 몸이라는 공동의 지옥 속으로 끌어내리려 했던 목소리, 그 목소리가 남긴 감각은 그녀의 살갗 아래 박힌 최초의 가시였다. 순결을 잃는다는 것이 아니라, 몸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치욕이 되는 이 원죄적 무거움 속에서, 테레자 자신이 곧 강보에 싸인 아기, 태어난 순간부터 짊어진 무거움 자체였다.
중절모 아래에서
중절모가 그녀의 머리에 얹히는 순간. 그것은 가벼운 왕관이자, 언제든 배신할 준비가 된 자유의 상징이었다. 둥글고 단단한 중절모의 형태는 그녀의 삶에 어떤 무게도 오래도록 머물러선 안 된다는 예술가의 강박을 암시했다. 그녀가 모자를 기울이거나 벗어던질 때마다, 주변의 모든 의미와 관계는 가볍게 전복되었다.
중절모가 드리운 그림자는 그녀의 눈빛을 익명의 경계 속에 숨겼고, 그 익명성 속에서 그녀는 모든 무거운 개념들을 가볍게 비웃었다. 모자를 벗는 순간, 그녀는 과거의 사랑, 우정, 심지어 이념까지도 깃털처럼 가볍게 놓아버릴 수 있었다. 중절모는 사비나의 존재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유일한 고정점이었으며, 그 외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배신되고 재해석될 가벼움 그 자체였다.
당신 앞에 두 칸으로 된 틀이 놓여있다. 한 칸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무거움을, 다른 칸에는 가벼움을 담을 수 있다. 필연과 우연, 긍정과 부정, 일회성과 영원성, 의미와 무의미, 책임과 자유. 이러한 가치는 당신에게 무거움인가 가벼움인가.
얼핏 단순해 보이는 이 소설은 마치 삶의 복잡성을 압축한 도해처럼, 어떤 시대의 이야기라도 그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독특한 틀을 제공한다.
쿤데라의 도해는 토마시와 사비나, 테레자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도식, 무거움과 가벼움이 있다.
이 존재론적 축은 각각의 인물이 삶의 리듬을 해석하는 좌표로 사용되며, 존재는 어느 극단에도 고정되지 않는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작가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빌려와, “삶이 반복된다면 무거울 것이고, 단 한 번뿐이라면 가벼울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 도식은 소설 전체의 철학적 기둥이다. 쿤데라는 이 공식을 통해 소설 내내 문제를 던진다.
“반복하지 않는 삶의 선택들은 의미가 있는가?”
매우 사적인 영역에서의 무거움은 이를 테면 이런 것들이다.
매일 새벽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눈이 떠지는 오랜 습관, 오래된 관계의 피치 못할 충성심, 남들이 쌓은 기대가 내 어깨를 누르는 감각. 작지만 매일 누적되는 무게다.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정체성의 스티커들, 성격, 직업, 역할, 관계에서 붙는 ~답게, ~해야 한다는 서사들. 가볍다가도 떼내려 하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수시로 내리는 결정들의 여운은 경중에 따라 나를 태운다. 그런 결정들로 나는 부분을 잃기도 하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반면 가벼움은 해방이자 무책임의 형태를 띤다. ‘그냥’이라는 말속의 자유, 여행 티켓을 결제해버리거나, 연락을 확 끊어버리거나, 마음이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 관계도, 감정도 앱을 닫듯이 닫아버릴 수 있는 시대의 속도, 이건 가벼운 게 아니라 가벼워질 수 있는 환경에 가까운데 그 속도 때문에 마음은 더 종잇장처럼 얇아진다. SNS 프로필을 고치듯 나의 서사마저도 손쉽게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그만큼 어제의 나에 대한 책임은 줄어든다. 사라짐도 허용되는 세상.
공적영역의 무거움은 구조에 끌리는 삶에 가깝다.
소속된 곳에서 내가 빠지면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일들, 사회적 역할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태도나 신념, 혹은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의견을 말해야 하는 책임감이나 대표성 같은 부담이 전형적인 무게다. 이 무게는 사적 영역에서와 달리 목소리와 행동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침묵조차 행동이 되고, 중립조차 태도가 된다. 공적 무게는 종종 의무감과 책무, 집단적 서사에 대한 참여의 얼굴을 띤다.
가벼움은 부유하는 시민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집단이나 신념에도 과하게 덧칠하지 않는 상태로 나타난다. 정치적 이슈에 깊게 관여하기보다는 해시태그처럼 잠시 흘러가는 참여, 커뮤니티의 규범에 완전히 들어가지는 않지만 주변을 느슨하게 배회하는 태도, 직장에서조차 나는 이 구조의 일부지만 내 삶의 핵심은 아니야라고 느끼는 거리두기 같은 것들.
이 가벼움은 방어적인 무관심일 때도 있고, 오히려 주체적 선택에 따른 열린 자세일 때도 있다. 자신이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아 이동할 수 있는 공적 이동성이 바로 이 가벼움이다. 하지만 이 가벼움은 종종 공허함으로 비치기도 한다. 소속되지 않는다는 자유는 곧 책임 없는 자유로 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쿤데라의 ‘회귀불가’에 대한 선언은 우리 중 일부 혹은 전부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현실은 그와 정반대의 궤도로 흘러가고 있다. SNS는 이미지, 문장, 감정의 형태로 끝없이 되감고, 다시 내보내고, 또다시 재생한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생하는 시스템이 우리가 만든 현실이다. 우리는 회귀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무한 재생시키는 존재가 되었고, 그 반복은 보상으로 그리고 쾌감으로 작동한다. 화면을 터치할 때마다 내가 나를 확인한다는 미세한 만족을 경험하고, 그 만족은 다시 반복을 부른다.
이 반복은 가벼움인가, 무거움인가.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의 무게는 같은 삶을 끝없이 살아야 하는 실존의 중압감이었다. 반면, SNS에서의 번복은 철저히 가볍다. 너무 가벼워서 무게가 없는 듯보이지만, 바로 그 가벼움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관리하고 조율해야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방식의 무거움이 된다. 가벼움을 지키기 위해 짊어지는 무거움, 그것이 오늘의 반복이 가진 정체다.
내가 말하고 싶은 ‘무한재생되는 일회성’은 이 시대를 가리킨다. 원본의 순간은 오직 한 번뿐이지만, 그 순간은 횟수의 제한 없이 복제된다. 그러나 반복이 원본을 강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을 가볍게 만들고, 깍아내리고, 기억의 두께를 얇게 만든다. 반복은 소비의 구조이며, 그것은 자체로 소모다.
쿤데라의 사유는 강물처럼 흐르며 매번 다른 방식의 존재를 요청한다. 이번 읽기에서는 ‘재생되는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또 다른 숙제를 떠안게 되었다. 흐르는 강물 속에서 방향을 바꿀 용기를 요구받는 대신 끝없이 반복되는 자신의 이미지와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거울의 미로 속에 서 있다.
관계에서 태어나는 순간이 있다. 토마시가 ‘Einmal ist Keinmal.’(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다)에서 만들어지고, 테레자가 ‘꾸르륵’ 소리에서 태어났듯이.
한 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가령 토마시가 여자들과 일회성을 갖는 것 같은 일은 그 사람의 본성이 되진 않는다. 한 번은 그냥 빵 하며, 뿡하며 지나가는 소음 같은 것이다. 쿤데라가 쓴 의미는 인생은 반복되지 않기에 한 번뿐인 선택조차 사실은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미묘한 지점에 있지만, 이 기울기는 또 다른 해석의 묘미가 된다. 누군가는 ‘한 번이면 별거 아니야.’하고 가볍게 말하지만, 누군가는 ‘반복이 없으니 더 해석하기 어렵고 그래서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꾸르륵’은 어떤가. 토마시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존재가 갑자기 형체를 갖추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우연하고 사소하고 심지어 약간은 우스꽝스럽다. 아주 비(非) 극적이고, 일상적인 몸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그 지극히 사소한 신호가 어떤 사람에게는 '이 사람은 이제 내가 의미를 부여해야 할 존재'라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토마시의 태어나는 순간이 가벼운 의미라면, 테레자의 꾸르륵은 한 번이 모든 것이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글로 만난 우리는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에서 태어난다. 그 문장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그와 나의 관계는 시작된다. 그리하여 어떤 관계의 무게는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상징성에 비례하게 된다. 타인은 그 사람이 쓴 문장이 아니라 문장 속에서 내가 구성해 낸 이미지에 가깝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어떤 작은 징후는 쿤데라의 꾸르륵처럼, 감각을 표현하는 아무것도 아닌 문장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감각으로 느끼고 언어로 다시 낚아 올린 뒤, 그 언어를 통해 서로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도 모든 것이 진실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쓰면서도 늘 아이러니를 느끼는 이 문장은 허구일 수도, 전략일 수도, 자기편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진실은, ‘문장이 의미를 갖는다면’ 그 순간에 그것은 경험적 진실이 되어버린다. 어쩌면 나는 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떤 놀이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이것을 철학적으로 반문한다면 술에 취한 듯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게 될.
브런치라는 매체에서의 반복은 피로를 낳기도 하지만, 피로를 낫게도 한다. SNS의 반복은 원본을 약화시키고 가볍게 만들지만, 어떤 반복은 소모가 아니라 치유적 리듬이 될 수도 있다. 기술적, 소비적 반복은 소모를 낳지만 서사적, 치유적 반복은 위안과 회복을 낳는다. 인간의 상처는 단 한 번에 만들어지지만, 한 번 말해서 낫지 않는다. 같은 이야기를 같은 감정을 같은 문장을 여러 번 통과해야 겨우 체온이 생긴다.
쿤데라의 ‘회귀불가' 선언은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는 여러 형태로 SNS상에서 끊임없이 영원회귀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생하는 시스템이 너와 내가 만든 현실이다. 나는 오늘 어떤 형태로 재생되고 있는가, 심지어 재생되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무한재생되는 일회성인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매 순간 어떤 보상을 받는다.
가벼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 매번 다른 흐름을 가진 감정과 상황을 지속적으로 주시해야 한다. 물은 항상 흐르고, 우리가 반복하는 오래된 문장과 결을 맞춰 어제의 강과 오늘의 강은 다르다. 그 다름을 매번 확인하고 조율해야 한다는 점에서 가벼움을 유지하는 일은 사실 무척 무거운 작업이다. 가벼움을 지키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무거움은, 어제와 같아 보이지만 결코 같은 적이 없는 강물을 매번 다시 바라보아야 하는 일과 닮아 있다.
사비나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프란츠는 모든 거짓의 원천이 개인적인 삶과 공적인 삶의 분리에 있다고 확신했다. 개인적인 삶 속에서의 모습과 공적인 삶 속에서의 모습은 별개다. 프란츠에게 있어서 '진리 속에서 살기'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p.188
덧붙이는 말.
쿤데라의 글은 제게 흐르는 강물 같습니다. 보지 않을 때는 존재를 감추는 듯하지만, 책장을 펼치는 순간 다시 깊고 느리게 흐르기 시작합니다. 마치 한 번도 흐름을 멈춘 적이 없다는 듯.
여수의 내해를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겉으로는 파도 하나 없이 멈춘 듯 고요하지만, 그 아래로는 미세한 유속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빛은 비처럼 내려 바다를 적셨고, 바다가 빛을 머금은 것인지, 빛이 바다를 흘러넘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셨습니다. 이번에 쿤데라를 다시 읽는 일은 그 내해를 마주한 것과도 같았습니다. 멈춰 있는 듯하지만 속 깊은 곳에서 아주 느리게 흐르고, 어느 순간엔 빛이 지나가며 전혀 다른 표정을 드러내는 풍경처럼, 그의 문장은 조용히 눈을 멀게 할 만큼 오래도록 나를 붙잡았습니다.
어떤 반복이 한 줄의 무심한 띠처럼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미지는 모두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