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보험이다.19
이제 어른이 되었나요?
첫 키스를 했던 날 비가 왔었나? 카페였었나? 어두운 달밤 커다란 나무 아래였었나? 내가 너무 오래전에 첫 키스를 해서인지, 첫 키스가 기억이 안 날 만큼 나이를 먹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첫 키스를 하고 나서 어른이 된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기억난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저는 키스도 해봤다구요”라고 하며 나도 알 거 다 아는 어른이니 내 말을 믿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그 우스운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이었는지 아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첫 키스 하나 가지고 거들먹거렸던 나에게 세상은 금세 강펀치를 날렸다. 옆을 보면 다정한 토닥임만으로도 잘 성장하고 어른이 되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강펀치를 계속 맞고 회복하고 다시 링에 나가기를 여러 번 반복해도 좀처럼 자라지 않는 것 같았다. 강펀치 없이 잘 자라서 다음 단계로 훌쩍 뛰어넘어 가서 쉬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고 신기했고 내가 불쌍했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억울했었다.
매도 맞다 보면 맷집이라는 게 늘고, 어떨 때 펀치가 세지는지도 알게 되고, 강펀치 없는 행운의 그 너머에 누군가의 희생이든, 슬픔이든 댓가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세상이 왜 나를 그렇게 링 위에 매정하게 세웠었는지, 억울해할 시간에 댄스 복싱을 하는 여유로움을 배우는 것이 낫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강펀치를 맞았거나, 강펀치를 맞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이 왜 강펀치를 맞았는지,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내 눈에 그들의 링이 보인다. 귀신같이 딱! 내가 그걸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만 찾아온다. 나랑 비슷한 펀치를 맞았거나, 비슷한 모양의 펀치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아파하고 회복했던 기억이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무 기뻤다. 내가 그동안 두들겨 맞은 이유를 알게 된 거 같았다.
“이러라고 세상이 나를 링 위에 세웠구나. 내가 내 주변 사람들을 강펀치로부터 보호해야지”
주변을 둘러보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강펀치의 위기에 있는지 살피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열심히 가르쳐주었다. 그랬더니 누군가는 정말로 강펀치를 피하고 성장했다. 기뻤다. 그는 두려울 때마다 나를 찾아와 물었고 나는 기꺼이 그에게 전력을 다해 강펀치를 보는 법과 피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반면에 내 말대로 하지 않아 강펀치를 맞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난했다.
“바보! 내 말대로 했어야지.”
시간이 지나자, 내 마음에 선한 기쁨은 어느새 사라지고, 내 선의의 잔소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내 말대로 해준 사람들에게는 배은망덕이라는 원망이 쌓였다. 나를 따라준 사람들의 멘토가 아닌 응석받이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내가 아는 ‘좋음’을 모두 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모든 것이 그저 ‘좋은 사람이고 싶은 욕심’을 가진 나의 이기심이었다.
봉사한다고 말하면서 모인 사람들 안에서 ‘더’ 좋은 사람이고 싶은 욕심에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서 속앓이를 했었다. 나 스스로 내 마음에조차 직면하지 못하면서 누굴 돕는단 말인가. 진행하면 이길 수 있는 보험금을 포기하는 의뢰인들은 내 좋은 마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바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누구의 잘못도, 옳고 그름도 아니건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을 나보다 부족한 것이라 치부했고, 내 도움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기며 도울 수 있는 내 자신을 우월하다 자만했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만 스마트폰으로 뭔가 중요한 인증 같은 걸 하거나 신청을 한다고 하면 걱정부터 된다.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블릿을 사용하지만 스마트펜을 활용하여 작업을 하는 것을 꺼린다. 자동차 영업사원이 가르쳐준 내 차의 여러 가지 기능을 나는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그저 차를 운행하고 온도에 따라 에어컨이나 히터를 켤 뿐이다. 나는 이렇게 많은 것이 둔하고 미숙하지만 사는 데 크게 지장이 없고 이것들을 능숙하게 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쓸 생각과 의지가 크지 않다. 누군가 나한테 지금 당장 그것들을 가르쳐줄 테니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고, 가르쳐줘도 잘 못하는 바보라고 한다면 나는 화가 날 것 같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힘들 것 같다. 나는 보험금 문제를 해결하는 게 직업인데, 의뢰받지 않은 일까지 해결해 주려고 내 도움이 왜 필요한지 설득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던 순간이 많았을 거라는 걸 요즘에서야 깨달았다. 만나기만 하면 무심결에 잔소리하게 되는, 나에게 의지해 오는 누군가와 일부러 연락을 끊었다. 들려오는 그의 소식은 나에게 속얘기를 털어놓던 모습과 다르게 평안하다. 다시 나를 만난다면 “그동안 말이야” 하면서 쏟아내고 싶은 이야기가 한 가득일 수 있겠지만 나는 그걸 받아내는 것이 무조건 선의나 도움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이걸 내가 보험설계사를 할 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열심히 준비한 종신보험 RP를 듣고도 사인을 하지 않는 사람을 원망했었고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지금의 나라면 그저 다음에 잡힌 다른 이와의 시간에 집중하되, 오늘 내 제안을 거절한 사람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 같다. 오늘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거절의 이유와 상황의 변화와 나의 부족함이 채워질 그 시점을 다시 고민하고 염원하며 정진할 것이다. 그의 거절도 나의 정진 길에서 만난 성장의 작은 한마디임을 받아들일 것이다.
오늘, 당신이 만난 누군가를 돕지 않아도 된다. 오늘 당신이 만난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았음을 알아차리는 그 순간. 그 찰나들이 쌓여서 당신의 도움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의 인연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른은 돕는 자가 아니라 도움받았음을 알아차리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