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현 Jan 28. 2021

보험 따라 길 따라


나는 오늘 아침 집에서 나와 승용차를 몰고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건물 주차장에 도착해 주차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사무실에서 근무를 하다가 도보로 3분 정도 거리에 있는 빌딩의 2층 식당에서 점심으로 부대찌개를 먹고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안과 진료를 받았다.



당신은 오늘 집을 나와서 어디를 어떻게 지나왔는가? 대부분의 직장인이 나와 비슷한 동선을 지났을 것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면 전철이나 버스정류장을 지났다는 차이 정도가 아닐까 한다. 위에 나열한 동선을 배상보험의 적용으로 바꾸어 나열해보겠다.



나의 집은 이웃집의 일상생활배상책임보험의 보험사고 구역이었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동안 나를 지나가는 수많은 차량의 자동차배상책임의 보험사고 대상이었으며, 주차장에서는 주차장배상책임의 보험사고 대상이었고, 엘리베이터는 엘리베이터 운행 중 사고에 대한 보험사고 대상이었고,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는 건물의 시설배상책임의 보험사고 대상이었고, 식당에 가는 동안 내가 밟고 지나간 보도블럭과 보도의 관리미비로 인한 위험으로 인한 지방자치제보험의 보험사고 대상이었으며, 식사하는 동안 식당 또는 그 건물의 영업배상책임 대상이었으며 병원에서 진료 중에는 의료배상책임 대상이었고,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 시설물배상책임의 대상으로서 현재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내가 만약 이 사무실에서 근로자로서 근무 중이라면 근로자재해보험의 대상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가 인지를 하든 안하든 어떤 공간에서든 무엇으로든 배상책임보험의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사회구성원의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질수록 배상책임보험의 역할은 점점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정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핵가족화의 가속화와 씨족사회라는 개념자체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인 현 사회의 구성원들은 상대가 미안한 마음을 정으로 해결해주길 원하지 않는다. 미안한 일은 미안한 만큼 금전으로 환산하여 배상받기를 원한다. 소위 ‘애들싸움’에서도 ‘어른싸움’은 아니어도 어른들끼리 앉아서 정산은 하길 원한다. 이런 경우들의 분쟁의 해결(정산)을 위해서 사회적으로 합의된 민사상의 손해액환산 기준이 정해져서 법정이나 기타의 분쟁에서 손해를 금전으로 환산하고 있고 많은 배상보험에서 이 기준을 준용하고 있다.



제도적인 측면으로 볼 때는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될 만한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의무보험이 늘어나고 있다. 특수건물신체배상책임이나 다중이용업소보험 등이 그런 예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재로 인한 사고의 최대 위험이 점점 커져서 국가나 사고를 일으킨 가해자 당사자가 개별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서고 있어서 제도적으로 위험과 비용을 분산시켜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상보험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에 비해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은 현저히 낮다. 영세자영업자의 인구가 500만을 훨씬 넘는데도 다중이용업소보험이라는 의무보험을 모르는 이가 대부분이다. 근로자의 사업주의 과실이 있는 산업재해 시 산재의 초과손해를 담보하는 근로자재해보험도 근로자재해보험을 가입해야 원청에 하청 지원을 할 수 있는 건설업계를 제외한 사업주들 외에는 그 단어조차 처음 듣는다는 사업주가 대부분이다. 산업재해는 산재만 처리가 되면 업주의 책임은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고 근로자들 또한 산재보상 외에는 산재사고시 자신이 청구할 수 있는 손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배상보험의 사회적 필요성과 다른 배상보험에 대한 인지 괴리의 원인을 배상보험에 대한 영업사원의 입장에 있다고 본다. 위에 예시된 다중이용업소보험이나 근로자재해보험의 경우는 그런 상품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보험영업인들이 대부분이고 알고 있더라도 그 반응은 시큰둥하다. 사고를 접했을 때 사고현장에서 발생하는 배상책임과 관련한 가해자가 가입가능했던 배상보험부터 검토하는 손해사정사 입장에서 볼 때는 요즘 보상에 혈안이 되어 있는 보험영업인들의 태도와 너무 상이하여 당황스러울 따름이다. 해당사고에 대한 배상책임보험에 가해자가 피보험자라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매우 다행스러운 일인데도 말이다.



누구보다도 고객을 사랑하는 보험영업인들이 배상보험에 무관심한 진짜 이유는 배상보험을 판매하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은 미용실에 다중이용업소보험 하나를 판매하면 1만원 정도의 수당이 발생한다고 한다. 그러나 까다로운 심사과정을 조율하고 신경 써야 하고 고객의 고객노릇을 받아줘야 하는데 차비도 나오지 않는 수당을 받기 위해 권할 사람은 별로 없다. CEO플랜이라는 컨셉트로 회사 대표들을 주요 고객으로 만나는 사람들 중 근로자재해보험에 관심 있는 설계사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고액 계약을 목표로 영업하는 이들에게 몇십명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해도 연보험료가 100만원이 되지 않는 근로자재해보험에 관심이 생길 리 만무하다. 나의 이런 주장은 1990년대에 한국사회에 등장한 이후 혼수의 필수품으로 성장한 종신보험과 비교해본다면 납득이 좀더 쉬울 것이다. (나는 계리사가 아니라서 보험료의 책정기준을 잘모르겠지만 어쩌면 많이 안 팔려서 보험금 지급 대상이 없어서 보험료가 낮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종신보험을 열심히 팔면서 보험업계는 가족 사랑을 외쳤었다. “만약 당신이 사고를 당한다면 당신 가족은요?”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면서 보험시장을 점령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당신이 누군가의 불행에 책임이 있다면요? 당신과 그의 가족은요?”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보자. 보험강국 대한민국에서 아직 점령되지 않은 보험의 여백, 배상보험시장을 선점할 준비는 되어있는가.



오늘 당신 또는 누군가가 걷거나 멈추었던 곳마다 존재하는 배상보험에도 당신의 영업력이 미치기를 바란다.





이수현 손해사정사

작가의 이전글 그날이 도적같이 이를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