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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Feb 17. 2021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내 개인정보

현대인들은 살면서 엄청나게 많은 서명을 하게 된다. 신용카드로 결제할 때도, 서류를 발급받을 때도 서명을 한다. 나 역시 수임계약을 체결할 때 의뢰인에게 여러 개의 서명을 요구하고, 또 의뢰인이 보험사에 서명해주었던 자료를 근거로 일을 하고 있다.




이 사회가 서명을 요구하는 이유를 궁금해 해본 적이 있는가? 상대가 당신에게 서명을 요구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당신은 단지 작은 가방을 하나 사고 싶었을 뿐인데도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한 화면의 여러 가지 사항에 동의를 해야 하고 서명을 대체하는 공인인증서를 이용해서 확인을 해준다. 당신은 동의했는데 어떤 것에 동의했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가방이 화면 속 물건과 같은 상태로 집에 잘 도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화될수록 서명을 통해서 의사표현을 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동의와 서명요청의 홍수 속에서 개인정보보호가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서명이라는 행위가 갖는 법률상 효과에 대해서 점점 무뎌지고 있다.




그리고 더욱 큰 문제는 그렇게 무심하게 동의하는 내용들이 무엇인지 확인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내용을 동의했는지를 내가 아닌 동의 받은 이들만 보관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서명을 한 내용 및 그 서류는 내 서명이 기입되어 있으므로 내 개인정보인데 그 서류를 보유하고 내용을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닌 것이다.




내가 실무를 하면서 서명과 관련해 가장 많이 겪는 에피소드는 ‘부위부담보특약’ 계약이다.




많은 분들이 부담보계약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는 자신의 기억은 청약서 서명을 모두 다했는데 일주일 정도 후에 한두 장짜리를 설계사가 가지고 와서 “거기다가 서명만 하면 염려했던 기왕증에도 불구하고 인수가 된다고 해서 서명해준 것뿐”이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이 내용은 문제의 소지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자신은 위염 증세만 고지를 했고 위만 안 좋은데 부담보부위가 소화기전체(간, 십이지장, 식도 등)를 포함한다는 것을 몇 년이 지나서 해당 부위에 대한 보험사고가 발생했을 때에야 알게 되는 경우가 가장 흔하고 어떤 회사는 부담보를 통해서 상당한 기간 동안 사망보험금의 지급액 자체를 감액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부담보특약 계약서는 정말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이거 사인 한 장만 더하면 된다”는 말에 이미 여러 장 해줬으니 한 장 더 추가되는 것에 내용 확인도 없이 서명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차후에 소화기에 암진단을 받고 나서 이럴 줄은 몰랐다며 한탄하고 하소연하지만 결국 본인이 자필서명을 하였다는 점 때문에 어떠한 항변도 할 수가 없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서명을 한 나의 개인정보가 나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처리했던 사안 중 어떤 고객은 부담보계약서에 서명을 한 사실이 없는데 부담보설정된 부위라는 이유로 보험금이 면책되자 그 부담보계약서에 본인이 서명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그 계약서의 스캔본을 확인하는데 3개월이 걸렸다.




보험사에서 고객이 서명했다는 그 부담보계약서에 대해서 저작권이라는 이상한 논리를 주장해 직접 받기 어려워 결국 금감원에 민원을 신청해 그 결과를 가지고 보험사에 다시 요구하여 받아보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요즘은 금감원에서 그나마도 처리기한이 임박하면 처리 중이니 기다리라는 문자 또는 우편을 통해서 지연을 하고 있어서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3개월이 훨씬 더 걸릴 수도 있다.




내 서명이 필요한 이유는 내 개인정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서명해준 내 서류를 내가 볼 수 없다.




최근에는 진단검사를 통해 계약을 한 유병자보험계약에서 고지의무위반을 하였다는 보험사의 주장에 대하여 피보험자를 만난 진단심사 간호사가 작성하고 피보험자가 서명한 문답서를 요청하였으나 개인정보라서 함부로 줄 수 없다는 황당한 답변을 들었다. 분명 해당 개인정보의 당사자인데 말이다. 내가 고지의무위반을 했다면 내가 서명한 그 문답서에 내용이 없다는 확인을 해주어야 하는데 결국 보험사는 그 문답서는 보여주지 않고 해지통지서를 보내왔다.




당신이 서명한 내용은 당신의 개인정보다. 당신이 서명하는 순간 당신이 무엇에 대하여 동의를 하였는지는 당신의 개인정보가 된다. 그 개인정보의 소유권은 당신에게 있어야 마땅하나 서명을 해서 원본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사진조차 남겨둘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신 단디 차리자.




당신이 서명해서 어느 누군가의 손에 쥐어준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내 개인정보.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수현 손해사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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