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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Mar 23. 2021

내 인생의 한줄




  나는 정말 사장이 되기 싫었다. 손해사정 업무를 좋아하지만 경영은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사장은 권한보다 책임이 더 크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회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결국 사장(대표손해사정사)이 되었다. 눈치 안보고 읽고 싶거나 필요한 책을 내 책상 옆에 마음껏 두고 싶었던 것도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회사에서 개인에게 허락할 수 있는 공간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회사에 비치된 자료나 책보다 개인 소장량이 더 많은 건 회사도 나도 서로 불편한 일이었다.



회사를 시작할 때 이미 근무했던 회사의 보유량보다 많았던 책은 5년간 꾸준히 늘어났다. 이사할 때마다 이 책의 운반과 정리가 항상 고민이다. 책장의 자리를 잡는 것과 반드시 내 손을 거쳐야만 하는 책 정리는 생각만 해도 팔과 어깨, 허리가 아파온다.



사실, 진짜 문제는 양이 아니라 의학서적의 경우 사진자료가 첨부되어야 하는 관계로 가격이 보통 책의 몇 배 이상이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책 중 가장 비싼 책이 25만원이고 중고로 구매를 해도 5만원 이상 넘게 지불한 경우가 많다. 가격이 내려가면 사진자료가 흑백이거나 하드커버가 너덜너덜해진 것이다. 



이렇게 돈과 공간 등을 사용해서 구매하고 보유하고 있는 의학서적들을 내가 다 정독하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이 책들은 많아야 1년에 5번 이상 뒤적인다. 소장하고 있는 의학서적 중 가장 많이 보는 책은 130여권 중 임상종양학, 심전도판독법, 해부학이다. 암이나 심혈관질환 관련 책을 제외하고는 사서 한 번 이상 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고로 7만원을 주고 구매한 마취통증의학 서적은 3년 전에 ‘외상성뇌출혈로 인한 재해사망’을 ‘심근경색 선행으로 인한 외상성뇌출혈발생 질병사망’으로 주장하는 보험사에 대응하기 위해 2페이지를 입증자료로 제출하고 본 적이 없다. 이때 논점이 되었던 심전도 및 혈액효소의 반응 경과가 수술 전 마취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어서 자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책들이 내 방에 들어설 때마다 “이봐 나를 왜 산 거야? 도대체 언제 나를 다시 열어 볼 거지?”하고 물어보는 것 같다. 



사람들은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 많은 책을 사서 읽고 있느냐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검색하면 대부분 나온다. 물론 나도 검색을 많이 하지만 검색의 결과는 껍데기만 보는 것 같다고 할까?



책장에서 꺼내어 열어놓은 책의 목차를 쭉 짚어 내려가 해당 목차를 열어서 찾는 것은 내가 방향을 잃지 않고 간다는 마음의 안정감을 준다. 혹은 내가 찾아 올라가야 할 큰 흐름을 역으로 알려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진균’을 검색엔진에서는 그 정의와 관련질환을 나열해서 보여준다면 책장 속에서 감염병학, 임상병리학, 생물학, 미생물학, 감염관리간호를 꺼내어 각각의 책과 학문의 입장에서 새로이 정의한 ‘진균’을 보게 되고, 내가 처리하는 사안에서 가졌던 선입견을 떠나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시각이 다른 사안에 대한 새로운 논점을 제시해주는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이 고리타분하고 비효율적인 수집을 멈추거나 줄일 생각이 없다.



책을 사람에 비유하곤 한다.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이 늘어나듯 내가 살아가는 환경 안에서 만들어지는 인연들이 내 삶 속에 만들어진다. 그들이 왜 내 주변에 있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고 깊이 알려고 하지 않지만 나와 닮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내 삶 속에 어느샌가 들어와 있다. 나랑 작은 연결고리들을 주고 받은 사람들. 그 사람들과의 인연을 위해 나는 시간도 쓰고 마음도 쓴다.



온전히 혼자되어야 써 내려가지는 손해사정서를 쓸 때 깊이 정독하여 깊숙이 만나지 못하였으나 내가 원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책들을 옆에 쌓아두고 찾아 나가면서 반가운 인사를 전해본다. 그 책에 내가 찾던 단어 하나만 있어도 반갑고 내가 억울해하는 내용에 객관적인 근거가 저자에 의해 명시가 되어 있는 페이지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쓸어내리며 해당 구절을 몇 번을 읽고 또 읽는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어떠한 일에 어떠한 책의 글 한 줄이 되기 위해서 인연을 맺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나랑 연이 되었다고 반드시 진한 우정이나 깊은 속사정을 공유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가며 깊이와 별개로 소중한 인연들이 쌓여가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닐까 싶다. 내가 살아온 길목마다 누군가와는 헤어지고 만나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어느 날 보니 그동안 함께 걷고 있었던 인연들이 쌓여서 당신의 전화기 주소록이 되어 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주소록을 열어서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고민해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떠오르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나누면서 해답은 아니어도 방향을 찾게 되거나 집착하던 문제가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인연의 책들은 그렇게 다시 이어지기도 하고 정리가 되어지기도 한다. 마치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들처럼 말이다.



수많은 소비 중 보험에 관한 소비처럼 인연이 중요한 품목이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좋은 책이 되어야 한다. 지금 당신은 어떤 구절을 써 내려가고 있는가? 당신이라는 책을 덮을 때 어떤 말을 하고, 당신의 자리가 책장의 어느 자리일 수 있을까? 오늘 쓰는 당신이라는 책의 한 구절. 그 한 구절, 한 줄이 곧 누군가의 책장 속 책의 한 줄. 



나는 누군가의 책장에서 언제 선택되어지고 읽혀지는 책이 될 것인가. 손해사정사로서 책을 덮을 때 ‘다행이다’ 말할 수 있고 책장에 다시 꽃혔으면 좋겠다. 혹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나의 생각이, 나의 마음이 내 당신의 한 구절, 한 줄이기를. 당신의 그런 마음이 내 인생의 한 줄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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