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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Jul 12. 2021

보험설계사는 신의 시향사


“인간은 아무런 허락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마침내 허락없이 죽음에 이르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물론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도 마찬가지의 상황에 직면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사실을 자각합니다.” - 토인비와의 대화 ‘삶과 죽음’ 편


 보험업계에 발을 들이고 처음 해본 설계프로그램에서 내 보험나이는 28세였다. 어느덧 40대 중반이 되었고 초기 시절에 만난 사람들이 미혼에서 학부형으로, 학부형에서 손자를 둔 조부모가 되고, 결혼식장에서 만난 사람이 부모님의 부고를 전해 온다. 담당설계사였던 나에게 아직도 그 소식을 전해오는 이들도 있고 내가 퇴사하면서 계약을 이관해준 지인 설계사를 통해 소식을 전해듣기도 한다.

오늘은 나와 가까운 사람에게 잘못 하는 바람에 내가 먼저 관계를 끊었던 사람이 다른 지인을 통해 내 연락처를 수소문한 뒤 연락을 해왔다.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에 그 사람이 나를 찾는다기에 황당했었다. 어떻게 나한테 연락을 할 수 있지? 내가 왜 이 사람 암진단 소식을 듣고 조언을 해줘야 하지?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 마음인 걸 모르지 않을텐데 굳이 수소문해서 나를 찾을 정도의 절박한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게 보험의 힘인가보다. 암진단을 받고, 수소문해서 찾게 되는 것은 보험증권과 보험에 관련된 사람들의 조언이다. 사람들이 언젠가 한 번은 그런 순간이 온다는 걸 알게 된다면 설계사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될 텐데, 그걸 절대 모를 때에만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이 절대규칙이라니. 오 신이시여!

마치 정해진 시기에만 열어볼 수 있는 고급향수를 사놓고 상상만 해야 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그 시기를 정하는 것은 오로지 신의 영역이라는 것. 그렇다. 설계사들은 냄새를 맡을 수 없는 향수를 파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짧게 근무하고 다른 업으로 이직을 하는 설계사의 경우는 본인도 그 냄새를 평생 맡아보지 못하기도 한다.

오로지 시간의 켜가 쌓여서만 서서히 깨달아가는 인생의 시향법은 고객에게 미개봉의 향수를 판매한 세월과 고객에게 향수의 개봉이 허락되는 고객을 만나야만 배울 수 있다. 그 전까지는 그저 모두가 이 향수가 반드시 매월 금전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향수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향수를 만드는 보험사도, 그 향수의 가치를 전달하는 설계사도, 그 향수를 구매하는 피보험자도 믿어야 한다. 설계사는 냄새를 맡지 않은 채로 피보험자의 욕구와 삶의 방향에 따라 향의 레시피를 제공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당연히 돈을 지불하자마자 그 성능을 확인할 수 있는 유형의 제품보다 보험은 판매하기 힘들다. 신이 정해놓은 시기를 기다리지 못해서 해약도 한다. 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서 보험기간이 끝난 후에 그 향기의 그림자만 아련한 경우도 있다. 이건 아무리 경력이 오래된 설계사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처럼 보험업에서 10년을 넘긴 혹은 20년을 넘긴 분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에게는 아름다운 향의 경험이 쌓여 확신과 열정이 되지만, 그 확신과 열정이 강할수록 맡아볼 수 없는 향수의 가치를 불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욱 크다. 그러나 그 향을 상상하게 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전달하는 기술과 의지가 그들을 이 불가사의한 향수시장에서 버티게 하는 힘인 것 같다. 예전에 설계사 시절 3W로 살아있는 전설이 된 선배가 친구의 장례식장을 다녀온 이후 실적이 향상되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그 선배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선배의 친구가 아니더라도 멀지 않은 병원의 장례식장에는 살아남은 이들이 떠난 이의 빈자리를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냄새를 맡을 수는 없어도 그런 방법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지친다는 것을 안다. 힘들게 판매한 보험의 향기에 대한 신뢰를 오랜 기간 유지하게 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도 아주 잘 안다.

그에 비하면, 나는 향기가 진동하는 일을 한다. 내 방 곳곳에서 향기가 가득하여 자주 후각이 마비되기도 한다. 너무 서정적으로 표현하여 거부감이 드는가?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내 방에는 안구실명 환자의 서류, 혈액암으로 사망한 아기, 암이 재발한 50대 여성, 치료를 위한 스테로이드복용으로 고관절에 장해가 남은 사람의 서류 등이 곳곳에 쌓여 있다. 그들의 고통이다. 나는 그 고통이 최대한 금전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들의 고통이 ‘苦痛‘이 아닌 다른 가치의 원천이 되는 ‘高通‘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한테 왔을 때는 이미 향기에 취해 있고 그 사람들에게 다음 향수를 고를 기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향기에 취해 있는 나에게 향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으니 보험을 잘 판매할 수 있을 거라고들 하지만 나는 너무 취해서 어떤 향이 누구에게 맞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은,개봉할 수 없는 향수를 두고 무시하고, 화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피할 수 없는 생로병사를 만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신의 섭리 앞에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로 인한 고통의 다른 가치 창출을 가능하도록 고안해낸 상품이 보험이다.

보험사가 폭리를 취하건, 설계사가 설명의무 위반을 했든, 고객이 고지의무 위반을 했든 간에 보험은 신이 시향의 시기를 정해놓은 향수다. 설계사는 신이 정한 개봉의 시기가 언제 오더라도 그 향이 다른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신의 시향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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