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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Jul 27. 2021

손해사정사가 처음 만난 손해사정사


여름이었다. 우리는 남편이 ‘가보자~가보자~’ 노래를 불렀던 그 바닷가 콘도로 휴가를 떠나는 길이었다. 잡지에 나오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새로 산 선글라스를 끼고 사진을 찍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두 돌을 갓 지난 아들이 매운 거 빼고는 어른 음식을 다 먹을 수 있게 되고 처음 맞는 휴가라 이번 여행은 훨씬 수월할 것이 기대되었고, 티셔츠와 반바지 속에 입은 비키니는 올 여름에는 꼭 바다의 짠내를 맡아보리라 비장한 각오를 하고 숨어 있었다.
출발한 지 1시간 정도가 지났는데 시댁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기 싫었다. 안 그래도 휴가 대신 시골에 가네마네 옥신각신하다가 결정된 바닷가 여행이었다. 하지만, 안 받을 수 없는 전화.


“여보세요.”


“동서, 흑흑흑 어머니가, 어머니가 으헝~으헝~”


“어머니가 왜요?”


“돌아가셨대~”


“여보! ...”



바로 차를 돌렸다. 우리의 목적지는 시댁. 시댁에 도착해보니, 어머니가 싸늘하게 식은 채 누워계셨다. 농약을 치시려고 경운기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경운기가 돌진하여 사망하셨다고 한다. 나는 차가운 어머니 손에 놀라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5일장을 치렀다. 옷이라고는 반바지랑 민소매티, 배꼽티밖에 없었는데. 나는 화려한 그 옷들 위에 상복을 입고 시골집에서 상을 치렀다. 결국 나의 비키니는 바닷물을 만나지 못했고, 우리는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그 바닷가를 가자는 말을 서로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49재를 치르기 위해 시댁에 갔을 때는 한창 고추를 수확해야 하는 시기였다. 밭에 다녀오니 처음 보는 여자분이 아버지랑 이야기하며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아버님, 그러니까 어머니께서 경운기를 운전하신건가요?”


“경운기는 평소에 누가 운전하시나요?”



그게 처음이었다. 내 인생에 처음 본 손해사정사. 손해사정사가 아니고 보험금 조사원이었으려나. 보험금의 현장 조사하는 모습을 그날 나는 처음 보았다. 가족이 아무도 몰랐던 재해사망보험이 어머니를 피보험자로 가입되어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어머니를 잃은 설움이 한창 뜨거운 49재 날에 어머니 잃은 팔남매들의 시선을 견디면서, 칠순이 넘은 아버지의 진실함만을 의지해서 힘겹게 대화를 이어나갔었다. 그때는 몰랐었는데, 그 장소에서 그 상황에서 그 일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지해야 하는 일이고 정확해야 하는 일이고 흔들리면 안 되는 일이다. 더군다나 사망보험금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조사를 다녀간 후 일주일이 지난 후 아버지를 대표수익자로 지정하는 서류에 형제들이 서명을 하고 얼마 후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그게 15년 전이었다. 그때 지급된 보험금은 사업이 어려워진 첫째 아주버님의 사업자금이 되었지만, 꽃을 피우지 못했다. 다행히도 지금은 재기하셨고 그때 보험금의 10배의 돈을 들여 아버지에게 2층짜리 새집을 지어드렸다. 그때 오작동으로 어머니를 숨지게 한 경운기는 폐기했고 아버지는 여전히 경운기를 타고 다니신다. 시댁이 산골이라 경운기가 오르막길을 다니는데, 나는 아버지가 저녁노을 산들바람 속에서 경사진 비탈길을 경운기를 타고 내려 오실 때에 경운기를 잡고 계신 팔과 몸 사이로 들어간 바람이 아버지 옷깃을 흔들어 댈 때의 아버지 모습이 너무 좋다. 그럴 때면 나는 박수를 치면서 “아버지~ 너무 멋있어요~” 하고 온동네가 떠나가게 소리를 지른다. 아버지는 도착해서 경운기에서 내리시며 “늙은 게 뭔 멋이 있남?” 하시지만 아이처럼 함박 웃으신다.



오일장 치르는 동안 엄마를 힘들게 했던 아이는 올해 수능을 본다. 나는 그동안 손해사정사가 되어 10년차 일을 하고 있다. 보험금 조사원을 놓고 불편하게 쳐다보던 8남매는 여전히 바람 잘 날 없다. 사람이 많으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아서 어지러운 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해결이 안 된다는 걸 얼마 전에서야 깨달았다.



가족 중에 그 당시 보험금 지급 과정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보험은 한글도 모르시는 시어머니가 매일 편지와 우편물을 읽어주는 우체부가 고마워서 내용도 모르고 가입한 보험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우체부는 어머니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얘기하고 돌아갔다. 어머니는 보험이 뭔지도 몰랐을 것이다. 밭에 달려 있는 고추 하나를 놓치는 것이 아까워서 식사시간도 아끼면서 고추를 따셨던 어머니에게 매월 보험료를 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우체부에게 도움이 되려고 열심히 돈을 마련하셨을 것이다.



요즘 보험 팔기 쉽지 않다. 나더러 다시 하라고 하면 나도 겁이 난다. 하지만, 우체부의 마음과 우체부의 마음을 챙긴 어머니의 마음에서 요즘 만나는 설계사들한테서 느끼기 어려운 그 무언가가 전해져 온다.



어머니는, 냉동실에다가 만원권 지폐를 숨겨놨다가 시누들 몰래 막내며느리인 내 속옷에 꽂아주곤 하셨다.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얻으셨는지 고게 아주 짜릿하고 스릴 있었다. 시집 간 지 5년도 안 돼서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이렇게 오래 그리울 줄 진짜 몰랐다. 어머니 보고 싶다. 내 인생 처음 만난 손해사정사는 시어머니가 소개시켜주셨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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