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iel Jul 17. 2022

어느 날의 습작

부제 : 페르소나

"갑자기 엄청난 벽을 만난 느낌이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진지한 두 번의 고백, 한 번의 진지한 거절, 그리고 그 거절의 번복에 의해 우리는 관계를 막 시작한 연인관계였다. 


"나는 로맨틱한 거, 설레는 거 그런 거 잘 못하는데"

"네가 아는 나와 여자로서의 나, 사회적인 나는 달라. 만약 네가 여태 알고 지낸 사회적인 나를 좋아하는 거라면, 여자로서의 나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있지 않다면 우리는 아마 오래 만나지 못할 거야"


이게 내가 한 말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한 번도 그를 남자로 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연약한 소리를 한 적이 없었고, 나의 말랑한 속내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우리가 알고 지내는 동안 지극히 누나와 동생의 관계였고 (내 입장에서 만이었지만) 그 흔한 이상형이 뭐냐는 질문조차 해본 적이 없는 그런 사이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고, 나는 거절했고, 하지만 우린 꽤 잘 맞았고 재밌었기 때문에 나는 내 인생에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내가 거절했던 남자를 붙들어 다시 만나는 이 상황에서 어이없게도 그는 큰 벽을 만난 기분이라는 말을 건넨 것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나는 사회에서의 나와 여자로서의 나를 조금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당차고 소신 있고 할 말은 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 남들이 봤을 때 말 잘하고 똑 부러지고 강단 있는 자존감 높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 생각에 대한 확신과 소신이 있었고 그것을 말하는 것에 망설임이나 걱정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당찼다. 나는 내 일을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고 내 가족을 사랑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고 나의 부족함 역시 꽤 알았기 때문에 나의 잘함과 못함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도 했다.

나는 사랑받는 것에 예민했고, 말 한마디에 상처받았으며, 표현에 민감했다.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소중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크게 느끼는 사람이었다. 표현받길 원했고 이해받길 원했고 공감받길 원했다.

특히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와 사랑을 나누는 애인, 남자 친구라면 더욱이 그래야 했다.

나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연약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충분히 가족의 사랑을 받고 자랐음에도 나는 왜 연인에게서 이런 부분을 충분히 충족시키고자 하는지, 충족되지 못했을 때 느끼는 불안감, 스트레스, 외로움이 다른 사람, 다른 여자들보다 더 큰지는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이 연애에 의해 나는 사회적인 나, 여자로서의 나에 대해 분명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벌어지는 간극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상해서도 아니고, 내가 여자 여서도 아니다. 그냥 우리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고마운 줄 모르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