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블루베리나이츠> / 노라 존스 'The Story'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평범한 고등학생이던 나는 그 날도 어김없이 쉬는 시간의 꿀잠을 즐기고 있었다. 웅성대는 교실 소리가 뜸해지며 잠에 깊이 빠져들려던 찰나에 내 어깨를 흔들어 대는 누군가가 있었는데, 바로 친구 A였다. 이제 막 초여름이 시작되어 모두가 에어컨 틀어줄 날만 고대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A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이유가 그저 더운 날씨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나 어제 첫 키스했다.
잠은 A의 작은 속삭임에 확 달아났다. 나는 마치 어제 그 자리에 있었던 당사자처럼 한껏 들떠 A가 전날 일이 생각나는 듯 몸을 베베 꼬거나 중간중간 ‘아, 모르겠어!’ 라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 그 모습에 깔깔 웃어댔다.
“막 진짜 귓가에서 종소리가 울렸어?” 그 어렴풋한 기억 속, 아무것도 모르던 두 여고생이 나눈 수많은 질문과 답 중 또렷한 것은 고작 이거 하나. 내 어리숙한 질문에 A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종소리는 아닌데. 있잖아, 노래 중에-” A는 말을 끝맺지도 않은 채 어떤 멜로디만 허밍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알 듯 말 듯 한 그 노래를 우리는 다른 쉬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야자시간에도 틈만 나면 흥얼거렸고 결국 집에 갈 때 즈음 가사의 한 부분을 떠올렸다.
‘Don’t know why.' 그건 이 노래의 제목이기도 했다. 친구 A는 거금 도토리 5개를 주고는 미니홈피 BGM으로 그 노래를 구입했고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그 노래만 들으러 A의 홈피를 들락거렸다. 잔잔한 재즈 반주에 하나의 악기처럼 들리는 매력적인 보컬은 특히 비 오는 날 더욱 구미를 당겼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노라 존스. 아는 거라곤 ‘파파존스’가 전부였던 내게 그녀의 목소리는 친구가 겪은 첫 키스만큼 신비롭고, 신기했다. 그 후, 나는 첫 키스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동의어처럼 머릿속에서 노라 존스를 떠올렸다. 사실 내 첫 키스 때는 그녀의 노래가 귓가에 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나는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마지막 장면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지도. 제레미(주 드로)와 엘리자베스(노라 존스)가 제레미의 카페에서 약 1년 만에 다시 만나 달달한 키스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바로 그 엔딩씬 말이다. 일명 ‘블루베리 파이(Blueberry pie) 키스’라고 부르는 그 장면은 우리나라에서 한동안 붐이었던 ‘사탕키스’나 ‘거품키스’의 조상 격으로 볼 수 있다. 입술에 블루베리 파이를 묻히고 잠든(척 하 는) 엘리자베스에게 키스하는 제레미가 성추행으로 고소당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영화스럽지만, 그 사이에 삽입된 ‘끈적끈적한 블루베리 파이의 단면’ 컷이 영화를 한층 밀도 있고 감각적으로 빚어냈다.
그때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이 노라 존스의 ‘The story.’
특유의 저음과 허스키함으로 그녀임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 노래는 ‘Don’t know why’와 달리 마이너로 흘러가지만 오히려 키스신을 더 로맨틱하게 만들었다. 가슴을 두드리는 콘트라베이스의 울림과 즉흥적인 재즈 피아노 선율에 빠져 특별하지도 않은 엔딩 크레디트까지 봤다. 물론, 그 덕에 큰 눈이 매력적이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노라 존스였다는 사실도 알게 됐지만.
이 장면이 눈에 띄는 이유는 또 있다. 전반적으로 외롭고, 차가운 영화는 비비드한 색감과 시끄러운 뉴욕 거리의 거친 소음을 꾸준히 깔고 있다. 등장인물들 모두 낮보다는 밤과 더욱 친하며, 웃음보다 눈물이 많다. 사실 ‘블루베리 파이 키스’도 영화 초반부 한 차례 먼저 등장하는데 그땐 그다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엘리자베스는 실연의 상처로 우울함을 한껏 머금은 인물.
하지만 다시 돌아온 엘리자베스는 다르다. 그러니까 새로운 사랑을 할 준비가 된 엘리자베스와 제레미의 진정한 첫 키스는 엔딩씬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장면이 주는 여운 역시 생각보다 짙다. 영화 내내 흐르는 우울함과는 달리, 사람들 대부분이 이 영화를 ‘달콤한 사랑이야기’로 기억한다는 것만 봐도. 게다가 그런 장면에 노라 존스의 목소리라니. 이제 노라 존스는 내게 완벽한 ‘첫 키스의 아이콘(?)’이다.
마지막으로 사소한 이야기지만, 주연 배우 중 처음부터 배역이 확정된 건 연기 경력이 전혀 없던 노라 존스뿐이었다고 한다. 그런 걸 보면 나만 그녀를 ‘첫 키스의 아이콘’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아님 말고.
와이잭. Vol.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