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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Oct 05. 2023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거지

그만두면 안 될까요



퇴근 이 분 전, 사무실에는 나와 함께 파티션 하나를 공유하는 옆 팀 차장님만 남았다. 시차출근제를 적극 활용하는 다른 직원들은 이미 삼십 분 전에, 더 빠르게는 한 시간 전에 회사를 탈출했다. 고요한 공간, 공기청정기 도는 소리만이 우리와 함께 남은 시간을 채우고 있지만 결코 외롭지 않으며 오히려 안정감이 생긴다. 이미 막내 사원이 퇴근한 다섯 시 반부터 나의 일일 업무도 셔터를 내렸다. 그때부터 나는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으며 하루를 정리한다. 고결한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루동안 착실히 쌓아 올린 견고한 분노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졸렬한 참회의 시간이다.


오늘 일기장도 시뻘건 글씨가 가득하다. 연차가 쌓일수록 실력은 물처럼 흘러내리고, 그 자리는 불 같은, 혹은 지랄 맞은 성질(머리)이(가) 들어찬다. 대표와 최대한 물리적, 정신적 접촉을 피하는 중인데 이유는 반드시 부딪혀 부득이한 사고를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때면 자꾸만 나는 기어코 그를 이겨먹고야 말겠다는 욕구가 솟구친다. 그의 무능력이, 무책임이, 무지 가운데 발현하는 무대뽀같은 성정이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고작 일개 직원이고 그 사람은 나를 뽑았고, 그런 내게 한 달에 한 번씩 돈을 주는 고용'주님'이라는 팩트가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그럼 나의 분노는 생각보다 빠르게 기화한다. 괜찮지, 뭐. 내 회사냐. 니 회사지. 그러나 오늘 같은 날, 나의 역치가 그런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과하게 차올랐을 때가 문제다. 오히려 그게 내 입 앞에서 출렁거리던 예민하고 잔인한 말이 선을 넘어 쏟아진다. 내가 저런 인간에게 간택당한 사람이라니, 이 몇 푼에 하는 게 고작 저런 존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니. 그러곤 백전 백패할 싸움판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뛰어들 땐 분명 잔다르크인 줄 알았는데, 돌아와 마주한 내 모습은 돈 키호테. 그리고 이로 인해 쓸데없는 업무까지 얹어 받아 오면 더 최악이다.


최근엔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나름 몸을 사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점차 사라지는 느낌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요즘 대표는 여러 이유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대표 없는 회의는 그렇다 치자. 호랑이 없는 골에 뭐가 왕노릇한다는 한자성어가 눈앞에 펼쳐지는 현장은 이골이 난다. 그래, 모든 회의는 그렇다 치자. 불만 가득한 고객의 전화,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공급사와의 미팅, 결재가 미뤄진 품의서. 어린 날의 치기와 일에 대한 애정으로 목이 터져라 쏴 댄 총알이 사실 아무것도 맞추지 못하고 공터에 나뒹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것들이 이 사무실 안 곳곳에 산재되어 있음을 알게 된 이상 그 전처럼 편히 기지개를 켜기가 어렵다. 공기청정기로는 정화되지 않는 눅눅한 고난의 냄새. 내일의 출근을 고민케 하는 것들. 반 평 남짓한 내 자리는 분명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지금이 기회다. 차장님께 조심히 고개를 빼꼼 들고 퇴사를 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곳이 나의 첫 회사도 아니고 나는 무려 네 번의 이직을 경험한 경력자가 아닌가. 이곳이 내 커리어의 끝이리라 생각한 적도 없으며 오히려 난 어디서든 잘 해내리라는 막연한 자신감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겐 다음 달에 빚져놓은 내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긁어모아 지불해야 하는 하루치의 생계가 있다. 그렇게 아직 남아있는 것들이 또 내일, 고단한 출근을 시작하게 할 것을 나는 안다.


그런 날에는 뜬금없지만 만두를 먹는다. 집 앞 편의점에서 작은 맥주 한 캔과 만두 네 알이 들어있는 냉동 김치만두를 사서 퇴근한다. 맥주는 냉동실에 잠시 넣어두고 만두는 전자레인지에 삼 분. 그동안 화장실에 들어가 손발을 닦고 나와 나만의 정갈한 한 상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만두는 너무 뜨겁고, 맥주는 너무 차갑다. 미적지근한 나의 일상에 나름 풍요로운 자극인 것이다. 만두는 내 소울푸드. 여러 소울푸드가 인생을 함께 견디며 흘러왔지만 서른 이후 만두에 정착했다. 만두는 완벽하다. 얇은 밀가루 피 안에 오만가지 재료가 터질 듯 들어간다. 종종 터져버리는 외피가 한없이 연약해 보이지만 뜨거운 열기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질겨져 그 모든 것을 온전히 포용해 내는 모습이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답다. 만두를 쩝쩝 씹으며 아껴두었던 유튜브 콘텐츠를 본다. 오늘도 퇴사하지 못하고 이렇게 찌들어버린 내가 조금 안쓰럽지만 별 수 있나.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매일 스스로에게 읍소한다. "그만두면 안 될까요?" 그때마다 삶은 내게 만두 네 알을 건네며 인자하게 웃어 보인다. "그 '만두'면 안될까요?" 잔인하지만 별 수 있나. 한 알씩 약처럼 삼키며 내일을 위한 마음을 비축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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