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희망 : 군만두
아홉 살 인생이 시작할 무렵, 수업시간에 장래희망을 발표하게 된 하루였다. 유난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내성적인 아이는 유치원 시절부터 '화가'라는 원대한 꿈을 품고 살아왔다. 아는 단어가 고작 헤아릴 수 있는 숫자만큼 밖에 없었던 당시 나에게 '그림'과 '화가'는 ㄱ(기역)과 ㅎ(히읗)만큼이나 멀고, 서로 아무런 관계없는 글자처럼 느껴졌지만 어떤 어른이 처음 알려준 그 단어를 자연스레 내 장래희망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무언가에 홀린 듯 화가라는 글자 대신 이렇게 적었다. [코디네이터]
그 다섯 글자는 내 생애 최초 자유 의지의 시발점이었다. 당시 동년배 중에 이 직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인지의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텔레비전을 보다 알게 됐겠지. 나는 <TV유치원 하나, 둘, 셋!>을 보다 지각을 하고 앓아누워있으면서도 <세일러 문>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비디오키드였으니까. 지금에야 '스타일리스트'라는, 좀 더 분명하고 프로페셔널한 어감이 묻어나는 단어로 치환돼 불리며 주목받는 직업이지만 그때는 전혀 달랐다. 낯선 단어에 아이들은 멋쩍게 박수를 치고 그중 몇은 "그게 뭔데?!"라고 크게 묻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골수에 아로새겨진 소심함이 자유 의지의 용기를 순식간에 집어삼켰고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아 팔과 팔 사이에 벌게진 얼굴을 파묻었다. 물론 그런 경험은 하도 많아서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확실한 것은 내가 부끄러워한 것은 아무도 모르는 직업을 말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종의 희열이 있었다. 분명 두피에서 솟아나는 몽글몽글한 땀방울은 개운한 쪽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도 나는 줄곧 '그런 쪽'을 선택했다. 학예회의 단골손님인 핸드벨을 할 때에도 나는 자진해서 음계 '시'를 골랐다. 반장보다는 부반장을, 부반장보다는 미화부장을 하고 싶어 했다. 밤이 까매질 때까지 면접 볼 인원이 가득한 방송반이 아니라 폐휴지함에 가득 쌓인 교내 신문을 만드는 교지편집부에 들어갔던 것도 그랬지. 과제로 만들었던 단편 영화에서도 스태프를 자처했고, 마치 업보처럼 클라이언트를 뫼시는 '을(乙)'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앓는 소리를 자주 하지만 이것 역시 내가 직접 택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길목마다 서 있던 대부분의 어른들은 차가운 얼굴을 해왔다. "주인공이 되어야지, 배짱이 작구나."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언제나 나의 고민은 돌고 돌아 이 자리로 찾아왔다. 꼭 주인공이 되어야 할까. 주류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 걸까. 내 선택은 태양계의 궤도를 벗어난 탈선인 걸까. 명왕성이 왜소 행성으로 분류되어 태양계에서는 퇴출되었다는 기사를 보며 '퇴출'이라는 단어에 보이지 않는 동그라미를 계속 그었다. 누구 마음대로. 명왕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데.
배짱은 부족하지만 늘 개미보단 베짱이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 마음의 기울기가 나름의 궤도를 만들어 냈다. TV 속 연예인들이 난처할 때마다 찾는 '코디'가 어쩐지 되고 싶었다. 자주 나오진 않아도 가장 세련된 음을 갖고 싶어 '시' 소리가 나는 벨을 선택했다. 마이크보다 교정지를 앞에 둔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엔딩 크레디트 가장 마지막에 올라가는 이름이야말로 짜릿하지. 대단한 책임감은 없더라도 누군가의 뒤에서 묵묵히 무언가를 감당하는 게 좋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무대 뒤 편. 얼굴도, 이름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둡다. 그러나 어둠의 세계 속에선 엑스트라가 주인공이듯. 나는 그런 존재들을 여실히 사랑한다.
탕수육을 시키면 따라오는 군만두 같은 삶을 소망한다. 줏대 없이 졸졸 쫓아다니는 것 같지만 없으면 허전하고, 사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닌가. 온전한 1인분의 몫은 아닐지언정 춘장에도, 짬뽕 국물에도, 탕수육 소스에도 모두 다 잘 어울려 아쉬운 면을 착실히 메꿔주는 한 조각. 앞으로 나의 장래희망은 군만두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