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날의 꿈> / 김영호 '그냥 좋은 사람'
이번 명절은 역대 최고로 끔찍했다. 세배를 하는 것이 두려웠다. 새해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어른들은 입을 열었다. 올해는 제발 이직하지 말고, 연애도 하고, 승진도 하고, 효도도 하고… 심지어 뒤늦게 온 고모와 고모부는 활짝 웃으며 ‘결혼해!’라고 말했다. 나도 안 세운 새해 계획이 타인의 입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 추석까지도 ‘남의 얘기’ 같았던 덕담들을 실제 내 귀로 듣게 되자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내가 지금껏 해오던 일들은 모두 쓸모 없어 보였으며, 어깨는 더 무거워졌고, 기어코 손에 쥐어진 세뱃돈이 부끄러워졌으니 말이다. 덕담의 탈을 쓴 악담인 게 분명했다. 그러자 진짜 ‘덕담’을 듣고 있던 스무 살 사촌동생이 난생 처음 부러웠다. 아직 인생의 매뉴얼이라는 것이 딱히 필요 없는 그 자식의 파릇파릇함이.
이 요상한 기분은 명절 내내 계속됐다. 오랜만에 만난 삼촌들과 대화를 하고 나니 어느새 나는 ‘구제불능의 아홉수’가 되어있었고, 다른 사촌들의 대기업 취업과 승진 소식 앞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는 부모님께 죄인이 된 것 같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장 속상했던 건 그 한심스런 눈초리에 대고 “난 지금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어요!”라고 대꾸하지 못하던 나 자신이었다.
내 나름의 ‘열심히’는 남의 기준에선 코웃음 칠 만한 논외(論外)범주였다.
또한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나 집이 아닌 타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감히 ‘열심히’란 말을 쓸 수 없지 않은가. 어른들의 말씀이 잔소리로 들리는 것도 그냥 내가 못나서가 아닐까. 나는 왜 남들과 똑같은 루트를 걷지 못 할까. 아니면 ‘잘 하고 있다’는 소리를 못 들을까 봐 도망치고 있는 걸까.
그런 나를 다독여 준 건 다름아닌 애니메이션 <즐거운 날의 꿈> 속 철수(송창의 목소리) 였다. 하늘을 날 거라면서 자기 몸의 5배나 되는 연을 만들질 않나, 이랑(박신혜 목소리)에게 자신의 관심사인 우주와 비행에 대해 더듬거리며 열변을 토하질 않나. 꽤나 눈치 없고 무모한 이 아이가 내게 위로가 될 줄이야. 얼굴은 곧잘 빨개지고, 몸에선 시큼한 땀냄새가 떠나지 않는. 게다가 여자랑은 말도 못 섞는 어리숙한 철수가 마지막쯤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철수의 매력은 사소한 것을 하찮게 보지 않는 태도였다.
고물을 줍거나 전파상에서 작은 기계를 만지며 한나절을 보내는 철수에게 우주비행사는 허황돼 보이기 마련. 하지만 철수는 그 꿈에서 한 발자국도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거면 공부나 열심히 하지 그러냐는 이랑의 말에 철수는 이 작은 일들이 언젠간 탄탄한 지반이 되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격지심이 아닌 진심으로 말이다. 어느새 나는 계주에서 2등 한 번 했다고 그나마 잘하는 ‘달리기’마저 그만 둬 버린 이랑이가 되어, 작게나마 앞으로 전진하는 철수를 동경하기 시작했고, 철수는 어느새 내 이상형이 되어 버리기 까지 했다! (2D 남자에게 빠지다니 분하다…)
그런 철수의 매력이 폭발한 건 사실, 이 모든 것보다 앞서 이랑이가 고장 난 라디오를 들고 처음전파상을 찾은 날이었다. 돌아갈 때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뒷머리를 긁으며 찢어진 우산을 건네던 철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순박해 보였다. 그러나 한참을 걸어가던 이랑이를 좇아와 꽤 멀쩡한 우산으로 바꿔 쥐어주며 내뱉은 “나 여자랑 반말하는 거 처음이야!” 란 한마디가 엄청 커다랗게 다가왔다. 말 한마디 하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누가 보기엔 하찮아 보일 수 있어도 그에겐 큰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 말 자체도, 말을 하고는 얼굴을 감싸 쥐며 괴상하게 뛰어가는 뒷모습도 지질해 보였지만 어쨌든 그건 철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었던 것 확실하다.
그래서인지 때마침 나오던 '그냥 좋은 사람'이란 노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피크로 튕기는 통기타 소리와 정직한 멜로디언 소리가 주는 올드한 느낌이 오히려 철수의 순진함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또한 2000년부터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OST를 부른 베테랑 가수 김영호의 목소리에도 영화의 분위기가 잘 녹아있는 기분이다. 사소하다 못해 시시한 장면을 그대로 풀어놓은 가사도 어쩐지 이 영화에선 큰 장점이 됐다.
작년 연말에 샀던 다이어리를 오랜만에 펴고 나는 어른들의 말씀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이직, 승진, 연애 심지어 결혼… 하지만 나는 작년과 별 다를 것 없는 일들을 적어나갔다. 대만 영화 많이 보기, 시집 10권 읽기, 잡지에 투고하기, 다리 꼬지 않기, 물 1L 더 마시기, 바디크림 꼼꼼히 바르기 같은 것들... 물론 내게 당장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언젠가는 이 작은 것들도 자양분이 되어, 누구나 깜짝 놀랄만한 나를 만들 거란 믿음은 확고해졌다. 이건 누구와도 등수를 매길 수 없는, 나만의 사소한 기쁨인 셈이다.
와이잭, Vol.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