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와이잭

결코 진부하지 않은

<친코와 리타> / 리마라 메니시스 '베사메 무쵸'

by 요지



친구 C는 이번 밸런타인데이에도 학 알을 잔뜩 접었다. 두껍게 자른 비닐종이를 학 알 모양으로 접고 그 안에 낱개 초콜릿을 하나씩 넣는 이 레퍼토리는(내가 아는 것만) 벌써 세 번째다. 처음엔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남자애한테, 두 번째는 대학 들어가 처음으로 사귄 구 남자친구에게. 그리고 이번 ‘초콜릿을 품은 학 알’은 곧 C의 현 남자친구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쯤 되니 나는, 내 남자친구도 아닌 그가, 지을 표정이 이미 눈에 선하다.


이뿐이랴. 첫 데이트에선 늘 후식으로 케이크를 먹고, 사귄 지 일주일쯤 되면 꼭 수족관에 간다. 삼청동 데이트를 갔다고 하면 이제 C는 남자친구와 일주일 안에 키스를 할 것이라 혼자 장담하기도 한다. 제 3자인 내가봐도 이 패턴이 진부하고 식상한데 당사자 C는 안 질리려나? 하지만 그런 내 우문愚問에 그녀는 현답賢答을 내놓았다.


“뭐가 똑같아, 사람이 다른데. 완전히 새로운 선물이지!”


C는 포장하는 내내 히죽히죽 웃어댔다. 그건 어떤 ‘설렘’이었다.



ⓒ 네이버 영화


영화 <치코와 리타>를 본 관람객들의 평가는 의외로 싸늘했는데 특히 ‘스토리가 진부하다.’는 평가가 가장 흔했다. 남자와 여자가 첫 눈에 반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하고, 오해로 인해 멀어지지만 결국 마지막은 해피-엔딩. 그 뻔한 러브스토리에 “진부하다.”는 말보다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은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남자와 여자’를 ‘치코와 리타’로 바꿔본다. 케케묵은 보통의 연애사가 단숨에 그 들만의 특별한 사랑이야기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 로맨스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은 치코와 리타의 첫 만남부터였다. 치코가 우연히 찾아간 한 클럽에서 노래하는 리타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되는 장면이다.


그 때 리타가 부르는 곡은 ‘첫 눈에 반하다’는 말만큼이나 고루한
베사메무쵸(Besame mucho).


베사메 무쵸는 중학교 때 학교 음악책 귀퉁이에도 있었고, 고등학교 때 방영하던 주말 연속극(일명 아줌마드라마) 속에서 주인공도 흥얼거렸다. 그러니까 내 기억 속 이 노래는 중년층이 끈적하게 부르는 지루한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리타의 베사메 무쵸는 달랐다. 잔잔한 재즈 피아노 선율 하나에만 의지한 그녀의 깊은 목소리는 내가 그 동안 이 노래에 대해 품고 있었던 마음의 빗장을 열었고 동시에 그들의 사랑은 그 어떤 데도 견줄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치코가 첫 눈에 반해 평생 뮤즈로 삼았던 리타를 40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도 역시, ‘고리타분한 로맨스’가 아니라 ‘치코와 리타만이 이뤄낼 수 있는 낭만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두 사람 얼굴에 표현된 주름에서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애틋함까지 느껴졌다.



ⓒ 구글 이미지


물론, 애니메이션이라는 독특한 형식과 쿠바 재즈의 정석을 보여주는 풍부한 음악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데 한 몫 한다. 지금껏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의 영역이라 생각해오던 내게 ‘치코와 리타’에 붙어 있던 15금 딱지(사실 그보다도 더 찐-한)는 매우 신선했다. 또한 두 뮤지션의 사랑 이야기답게 음악이 일으키는 시너지도 만만치 않았는데, ‘치코’라는 캐릭터의 실제 주인공인 쿠바 재즈피아니스트 베보 발데스Bebo Valdes가 OST의 연주를 맡아서 한층 더 환상적이고 매력적인 장면들을 구현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음악과 작화만이 이 사랑을 특별하게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군가에겐 진부한 로맨스가 특별해질 수 있는 건 ‘치코와 리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음악과 형식 역시 그들로 인해 새로워진 것 같다. 각자의 역사와 감정은 오직 그들만의 것이니까. 나는 C의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본다. 그 대답은 옳았다. 그 어떤 사랑도 결코 진부하지 않다. 아니, 진부할 수 없다.


Ps. 제목에서 언급한 ‘리마라 메니시스’는 극 중 리타 목소리를 연기한 배우입니다.




와이잭, Vol.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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