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영춘권> / 9와 숫자들 '이런게 사랑이라면'
2015년부터 갑자기 시집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동안 서점에 갈 때마다 ‘오늘은 시집을 사야지’라고 숱하게 다짐했지만, 막상 시집 코너에 서면 이 얇고 모호한 책보단 몇 천 원 더 주고 소설을 사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금방 마음이 변해버리곤 했다. 그래도 꼭 시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건 독서모임의 선배 E 덕분이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책을 추천하면 모두 그 책을 읽고 와서 생각과 느낌을 나누는 모임이었는데 조금 늦게 합류한 선배는 책 대신 중견작가의 시 다섯 편을 복사해왔다. 그 날은 시라는 건 그저 ‘짧은 글’ 정도로 치부했던 내가 부끄러워진 하루이기도 했다. 슬프다, 벅차다 혹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위해 페이지의 절반을 배경 묘사와 인물 묘사에 넘겨버리는 소설과 달리, 감정을 돌 직구로 날리는 시 몇 줄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그 후부터 매 달 한 권씩 시를 사기 시작해 4년,
시집들은 내 방 책장을 동네 책방 부럽지 않을 만큼 점령했다.
그중에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소설처럼 길게 쓴 시도 있고 세 줄 정도의 짧은 시들도 있었으나 마음을 더 크게 흔든 건 후자였다. 수더분한 단편 시들을 읽고선 ‘작은(내 생각엔 짧고 굵은) 고추가 맵다’는 옛 말도 역시나 옳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항상 더 심쿵(심장-쿵!)한 쪽은 소박함이었다. 평소와 달리 너무나 멀끔한 차림으로 “복학하고 처음 학교에 간 날, 아마 비가 내렸지. 너는 분홍색 땡땡이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널 만난 건 내게 엄청난 행운이고 너의 속눈썹까지 사랑해”같은 거창한 고백도 물론 좋지만 평소처럼 카페에 앉아 같은 음료를 마시다 환히 웃으며 “좋아해”라는 한 마디에 더 설레는 것만 봐도 말이다.
어쩐지 <두근두근 영춘권>을 보고 스멀스멀 올라오던 웃음이 낯설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4분밖에 안 되는 러닝타임 내내 현철(조현철)과 재영(박희본)은 고작 사랑싸움(?)만 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들의 사랑싸움은 단어처럼 아기자기한 게 아니라, ‘영춘권’이라는 중국 무술. 보는 동안 사람의 혼을 쏙 빼놓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 “지금 우리가 하는 게 연애예요, 2음절로”라는 솔직 담백한 한 마디가 내 광대를 하늘로 보내 버린다. 로코성애자인 내가 지금까지 봤던 200여 편의 장편 로맨스 물은 이 초 단편 영화로 수렴했다.
그래, 사랑이란 바로 이런 소박한 맛이지!
밴드 9와 숫자들의 ‘이런 게 사랑이라면’ 이란 노래는
그런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곡으로,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흘러나온다.
사랑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어 놨으나 후렴구는 무조건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난 하지 않겠어요’로 일관하는데, 그 말이 역설처럼 느껴지면서 사랑스러운 시 한 편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9와 숫자들 특유의 몽롱한 복고풍 사운드와 만나니 두 주인공의 거친 사랑싸움이 풋풋하게 느껴질 정도. 일명 ‘B급 단편영화의 대부’이자 이 영화의 감독인 윤성호 감독은 작품마다 꼭 9와 숫자들과 함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 가을이 돌아왔다. 빠져들 것만 같이 파란 하늘은 옆 자리의 그와 어디든 떠날 수 있게 하는 무모한 용기를 허락한다. 사람들이 가을을 좋아하는 마음은 시를 좋아하는 마음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짧고 강렬하니까. 그러니 연애라고 뭐 다르겠는가. 대단하고 화려하게 펼쳐 놓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거창하지 않아서, 소박해서 좋다. 어떤 미사여구도 없이.
ps. 영춘권은 공격이나 수비보다는, 누가 먼저 주도권을 잡느냐를 목표로 하는 무술이라고 합니다. 연애의 밀당과 많이 닮지 않았나요?
ps2. 영화 <두근두근 영춘권> Full 영상은 유튜브에서도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와이잭, Vol.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