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을 읽고, 지성과 의지의 관점에서.
소크라테스께서는 어떤 생각에 깊이 몰두하시다가 뒤에 처지셨다네.
선생님은 종종 그런 식으로 아무 데서나 후미진 곳으로 물러나셔서 발길을 멈추시고서 가만히 서 계시는 습관이 있으시다네.
- 향연, 174~175, 플라톤
세계가 내 주위에서 무너졌다. 그 애가 떠들고 다니겠지, 내가 죄를 지었다고. 그 말을 아버지한테도 하겠지, 어쩌면 경찰까지 오겠지. 모든 혼돈의 공포가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 p.20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에게 자기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다는 것에서 비롯하는 거야.
- p.52
나는 지금까지 마음을 빼앗긴 여성에게 접근하는 것에 접근하는 것에 성공한 적이 없었는데, 이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인상은 이전의 모든 여성들보다 더 깊었고, 이전에 빠진 사랑이 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강력했다.
- p.106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나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 p.123
싱클레어는 쪽지를 하나 받는다.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인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가 적혀 있다. 싱클레어는 의지를 가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지성을 갖추지 못한 존재였기에 이 쪽지의 의미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압락사스는 우연히 알게 되는 게 아니야. 알아두게. 압락사스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할 테니, 난 압락사스에 대해 좀 알거든.
- p.136
계속 방황하던 싱클레어는 교회 오르간 음악을 따라가선 한 남성을 만난다. 그에게 신과 악마적인 것에 대한 고민, 압락사스 이야기를 하자, 피스토리우스 역시 압락사스를 안다고 말한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의 지적인 면모 - 다양한 책을 읽었고 한때 신부였던 데다 음악까지 할 수 있는 - 에 매료된다. 그가 진정으로 압락사스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늘 무엇인가, 내가 아름답고 성스럽게 느끼는 것에 에워싸여 있어야 해. 오르간 음악이든 비밀 의식이든, 상징과 신화든, 나는 그런 것이 필요해. 그리고 그런 것에서 떠나지 않겠네. 그게 나의 약점이지.
- p.173
그러나 피스토리우스 역시 자신만의 약점이 있다. 그는 압락사스를 과거 설화와 기록을 통해 인지할 수는 있지만 이를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신의 세계를 벗어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피스토리우스는 지성은 있지만 의지가 없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새 그림 아래 열린 문에 짙은 색 옷을 입은 키 큰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아들의 얼굴과 똑같이 시간과 나이가 없이 혼이 깃들인 의지로 충만한 얼굴로, 아름답고 기품있는 여성이 나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 p.187
싱클레어는 마침내 다시 데미안을 만나고, 그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난다. 데미안보다 고귀하면서도 진짜 사랑의 모습을 지닌 그녀를 보며 싱클레어는 진정한 편안함을 느낀다. 그녀 주위에는 싱클레어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우리들 누구에게나 신뢰와 이해심이 가득한 경청자였다. 이런저런 생각은 메아리였다. 모두 그녀에게서 나와서 그녀에게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 가까이에 앉아서 이따금씩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성숙과 영혼의 분위기에 젖어본다는 것이 나에게는 행복이었다.
- p.198
에바 부인 역시 데미안처럼 지성과 의지를 모두 가진 인물이다. 그러기에 그녀는 그녀 공동체 내부의 모든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데미안과의 차이점이라면 데미안은 자신의 힘을 전쟁으로 향하는 반면(군대에 종사함으로써), 에바 부인은 자신의 힘을 생명으로 향했다는 점이 아닐까?
이건 다만 시작이야. 어쩌면 큰 전쟁이 될 거야, 몹시 큰 전쟁이. 그러나 이것도 그저 처음에 불과해. 새로운 것이 시작되지. 새로운 것이란 낡은 것에 매달린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겠지. 넌 무얼 할 거니?
- p.213
평온하던 싱클레어와 데미안, 에바 부인의 세계는 커다란 새가 불타오르는 꿈과 함께 무너진다. 전쟁이 일어나고,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모두 전쟁터로 향한다.
지금 나는 많은 사람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상을 위해 죽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은 개인적인 이상, 자유로운 이상, 선택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떠맡겨진 공동의 이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했음을 알았다. 그렇게 봉사와 공동의 위험이 그들을 제아무리 제복을 입혀 획일화해 놓았어도 나는 많은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들이 운명의 의지에 눈부시도록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 p.217
싱클레어는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 - 전쟁이 새로운 질서와 세계를 제시해주리라 믿는 - 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가 개인의 완성과는 상관없는 공동의 이상 - 국가의 적을 향하는 - 임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싱클레어는 죽음 사이에서 부상자들을 구하는 인간성을 발견한다. 그것이야말로 이전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에서 돋아날 수 있는 희망이었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어쩌면 다시 한번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혹은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 넌 네 자신 안으로 귀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 p.221
데미안은 부상당한 싱클레어 앞에 나타나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고통에 기억을 잃었다가 깨어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동시에 내면으로 들어가면 언제든지 데미안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
싱클레어가 만난 인물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프란츠 크로머 : 의지는 있으나 지성이 없는 인물 - 타인에게 고통을 준다
2. 데미안 : 의지와 지성을 모두 갖춘 인물 - 싱클레어의 이상향이자 목표
3. 피스토리우스 : 지성은 있으나 의지가 없는 인물 -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4. 에바 부인 : 모든 것을 갖춘 그 자체
1904년 (27살) 페터 카멘친트 - 첫 장편 소설, 자연으로부터 배운 것들을 글로 쓰겠다
1915년 (38살) 크눌프 - 한 방랑자의 이야기, 진리를 찾아 떠나는 인간
1919년 (42살) 데미안 - 완전한 인간의 모습, 신과 악마가 결합한 인간, 지성과 의지의 결합
1922년 (45살) 싯다르타 - 완전한 인간의 모습, 총체성에 대한 깨달음
1930년 (53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완성된 인간으로 향하는 길, 지성과 욕망의 대립
1943년 (66살) 유리알 유희 - 완전한 인간을 되돌아보며, 역사와 예술에 대해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을 읽으며 느꼈던 간략한 주제들과 데미안을 비교해보았다. 초기 작품인 '크눌프'까지만 해도 주인공은 무엇이 진리인지 명확히 모른다. 다만 방랑하며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데미안'을 기점으로, 헤세는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악마적이고 욕망적이며 의지적인 면모를 가져야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싯다르타'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도 비슷한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이 얻는 깨달음이 다르다. 싯다르타에서는 강과 물로부터 만물의 총체성을 깨닫는 반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지성과 욕망의 대립 및 합일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유리알 유희에서 헤세의 모든 깨달음이 찬란하게 빛난다. 진정으로 완전했던 인간의 전기를 보여주면서, 역사와 예술의 역할에 대한 통찰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인간은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까지 보여주는, 그야말로 성장과 죽음까지 모든 깨달음이 담긴 완전한 예술 작품이다.
음악이 몹시 좋아요, 음악은 별로 도덕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도덕적이지요. 저는 도덕적이지 않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도덕적인 것에는 늘 시달렸거든요.
- p.135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와 나눴던 대화 중에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었다. 음악은 판단하지 않기에 도덕적이지 않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날카롭게 분석했듯이, 도덕(혹은 선과 악)은 본래 좋음과 나쁨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판단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음악에는 인간의 도덕을 넘어선 무언가가 들어있다.
필리핀으로 봉사활동을 가서 음악을 가르쳤던 친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에게 박자를 가르치는데, 4분 음표와 2분 음표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순간적으로는 이해해도 돌아서면 까먹는지라 정작 음악은 가르치지 못하고 수학만 가르치고 왔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 아이들은 음악에 맞춰 기가 막히게 춤을 잘 출 뿐만 아니라 리듬감과 음감은 대단하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음악을 배우지 않아도 내면적으로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1500년에서 1800년 사이에 정말 다양한 음악들이 만들어졌는데, 양식과 표현 수단은 가지각색이지만 그 정신, 아니 도덕은 모두 동일하다. 고전 음악으로 표현된 인간적 태도는 늘 똑같다. 그것은 언제나 같은 종류의 생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우연을 넘어서려고 노려한다. 고전 음악의 태도란 이런 것을 의미한다. 인간 존재의 비극을 아는 것, 인간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 용감함, 청랑함!
- 유리알 유희 서문, p.54, 헤르만 헤세
아마도 글은 깨달음이나 사유를 전하기 위해서 이성과 논리가 필요하지만, 음악에서는 그런 사유 없이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인 걸까. 오로지 음악을 듣기만 해도 그 속에서 감정을 느끼며 동시에 구조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음악은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으며, 압락사스처럼 깨달음을 전달해주는 진정한 매개체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데미안이 오늘날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영향을 받아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데미안처럼 자신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해 줄 스승을 찾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각자마다 데미안에서 읽어내는 것들이 다르겠지만, 그 어떤 것이든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헤세가 대단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한편으론 데미안 속에서 과거 작가들을 느낄 수 있었다. 에바 부인의 완결성은 도스토옙스키 장편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 '죄와 벌'의 소냐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그루셴카 등 - 들의 '대지'와 같은 생명의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또한 데미안이 말하는 카인의 의지나, 무리 지어 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에서는 여지없이 니체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직접적으로 니체의 서적에 빠져있었다는 문구도 발견할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철학자들이 '새로운 생각'이라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면, 소설가들은 그 뿌리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라는 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나무에 열린 과일들을 맛있게 따먹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데미안을, 지성과 의지를 모두 갖춰야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올바른 지성이 없는 의지는 알의 잘못된 부분을 쪼아 결코 세계로 나올 수 없을 것이며, 올바른 의지가 없는 지성은 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 있을테니까. 그렇게 지성과 의지를 모두 갖춘 인간만이, 헤세가 적은대로 총체적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불확실한 미래가, 그것이 가져올 어느 것에나 우리가 준비되어 있음을 발견할 만큼 우리들 누구든 그토록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 자기 속에서 작용하는 자연의 싹의 요구에 그토록 완전히 따르며 기꺼이 살리라는 것.
- p.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