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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중 Jun 20. 2022

[리뷰 & 필로어스 모임] 선악의 저편 1-6장


니체! 콧수염이 멋진 까다로운 철학자! 그가 쓴 글은 읽을 때마다 명확히 잡히지 않는 독특함을 갖고 있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읽는 ‘선악의 저편’ 서문, “진리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떠한가? 모든 철학자가 독단주의자였을 경우, 그들이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혐의는 근거 있는 것은 아닐까?” 에서도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명료하지가 않죠. 그만큼 세미나를 하면서 튜터님들과 멤버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첫 세미나에선 니체가 왜 “‘독단적 철학 (예를 들면 아시아의 베단타 이론과 유럽의 플라톤주의)를 흉한 얼굴이라 표현했을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 대답을 위해 니체가 말하는 플라톤주의를 들여다보면, 플라톤주의는 ‘감각을 멀리하고 이성을 중시’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대답해주는 기준’이라고 설명되지요. 그러나 니체는 이러한 기준 자체에 의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진리를 원한다고 가정했는데, 왜 오히려 진리가 아닌 것을 원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에서 “진리가 가상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선입견”이라 주장하죠. 그러기에 니체는 플라톤주의를 비롯한 기존 철학들이 도덕, 옳고 그름, 선악을 제시하는 독단적 기준이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기존의 도덕과 철학이 문제라고 보았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기존 철학들이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가정으로부터, 현실에서 진리를 찾았다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결과로 현실로부터 진리를 찾아내는게 아니라, 진리에 맞게 현실을 왜곡되게 바라보게까지 되었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니체는 “도대체 이것이-대답이란 말인가? … 아니 오히려 물음의 반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니체는 이어서 새로운 도덕, 철학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삶의 조건으로 비진리를 용인하는 것, 습관화된 가치감정에 저항하는 것” 다시 말해, 도덕적인 판단과 기준 자체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는 의심으로부터, “이 일을 감행하는 철학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선과 악의 저편에 서 있게 된다”고 말하죠. 이러한 니체의 의심은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인 그리스도교’로도 이어집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을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라는 말에서부터, 그리스도교의 도덕에도 반기를 들죠.





 두 번째 세미나에서 다룬 질문은 ‘니체가 추구하는 새로운 철학자는 어떤 사람인가’ 였습니다. 책 곳곳에서 찾아본다면, “비판가이며 회의론자이고 독단주의자이며 역사가이고,” “그 외에 시인이며 수집가이고 여행가이며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며 도덕가이고 예견하는 자이며 ‘자유정신’이며 거의 모든 유형의 인간”이라 할 수 있겠죠. 


니체는 새로운 철학자들이 이렇게 광범위하고 다양해야 하는 이유를,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 것을 감당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따라, ~ 가치와 순위마저도 결정할 것이다”라고 적어두었습니다. 새로운 철학자들이 ‘명령하는 자’이고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식과 한계를 폭넓게 알아야만 새로운 기준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여겨서 그랬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철학자들과 대비되는 존재로, 니체는 당시 유럽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간들을 ‘오늘날 유럽에서의 도덕은 무리 동물의 도덕’을 따른다고 적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은 소수의 명령하는 자와 다수의 복종하는 자가 존재하는 사회 구조로부터 만들어졌고, 명령의 기술을 희생하고 복종하면서 사회와 공동체의 안정을 꾀한다고 보았죠. 이렇게 공동체의 보존과 안녕을 지키는 게 ‘도덕적으로 옳다 (선)’는 가치 판단이 생긴 이후로, 개인을 공동체 이상으로 끌어올리고 이웃에게 공포를 주는 모든 것은 ‘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니체의 새로운 철학자는 공동체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인간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독자적인 존재’, ‘가장 고독한 자, 가장 은폐된 자, 가장 격리된 자, 선악의 저편에 있는 인간, 자신의 덕이 주인, 의지가 넘쳐나는 자가 될 수 있는자’를 새로운 철학자로 여겼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말이죠.





 또 다른 질문으로 남은 문장은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은 항상 선악의 저편에서 일어난다.” 였습니다. 이는 니체가 말한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으로도 이어지죠. 다음에 읽을 7~9장 사이에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겠지만, 아마도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 있는 사람으로 언급했던 부처가 니체가 추구했던 새로운 철학자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혹은 선악의 저편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부처는 홀로 고독하게 살 수 있었음에도 중생들에게 진리를 설파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니체가 생각했던 새로운 철학자의 사랑이, 부처의 자비와 비슷한 개념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혹은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유대인에게 말했다 : 율법은 노예를 위한 것이었다. – 내가 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신의 아들로 신을 사랑하라!” 라는 말에서처럼, 예수가 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네요.





 니체는 읽을 때도 모르겠고, 세미나 할 때도 잘 모르겠고, 적을 때는 더욱 모르겠는, 참으로 오묘한 철학자라고 여겨집니다. 참신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철학자인 것은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스스로가 그 사람을 이해하기엔 아직 작은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근데 뭐, 전공할 것도 아니라 별 문제는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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