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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고행일기

내가 왜 거기를 갔을까

by 팬티바람


갑자기 후지산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작년 겨울에 한라산 등반을 마치고

괜한 정복심이 발동한 것일까?


가야겠다 생각하면 사이즈를 재보고

만만하다는 판단이 들면 떠나는 것은 어렵지않다.

친구랑 같이 떠나기로 한다.

여자친구와 같이 못가서 내심 아쉽기는 했지만

선물로 퉁쳐보기로 한다.


여행을 가는 방법은 간단하다.

짐을 싼다, 여행지에 간다. 집에온다.

산을 오르는 방법도 간단하다.

짐을 싼다. 산을 오른다. 다시 내려온다.



도쿄에 도착해서

후지산 근처 마을로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게스트하우스에 간다.

짐을 풀러보니, 아뿔사

충전기와 세면용품을 넣은 포켓이 없다.

충전은 친구껄로 쓰지만 남자끼리 여행을가면

상대방이 알아서 챙겨올꺼니까 안 챙기는 물건이

바로 세안제, 치약이다.


둘다 없다.

뭔가 예감이 좋지않다.

이렇게 무언가를 왕창 빼먹고 떠나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나고보니 없어도 다 되더라.

그간 나는 얼마나 쓸대없는 짐들을 챙겨서 돌아다닌걸까.



후지산은 구름을 품고있었다.

그 흔한 나무 한그루 제대로 없지만

빈자리를 충분히 메꿔줄만큼 지천에 가득했다.


고도 3700m가 되는 산을 하루만에 오르는 건 정말 곤욕이었다.

100미터마다 산장이 있는 이유가 있더라. 좀 쉬라고.

서다 가다를 반복하니 후회와 탄식이 나온다.


나를 허락해주지 않는 산 같아서 괜히 미워보인다.

구름보다는 산장에서 일하는 산장지기들의 담배연기가 더 눈에 들어온다.

돌 밖에 없는 산길에 복사-붙혀넣기 같이 자라있는 이름 모를 저 화초는

공간에 대한 상실감까지 들게한다.



길을 잃지말라는 표시로 뿌려놓은 화살표가

무언의 압박으로 느껴진다.


닥치고 올라가.


내 몸과 생각이 따로 놀기 시작할 때 쯤,

등산이 시작된다. 머리로는 멈춰라고 이야기하지만

발은 움직여야한다. 규칙적으로 천천히 호흡하면서

간절하게 한 발 한 발 올라간다.


같이 간 친구와 서로 파이팅을 외쳐주며

꾸역꾸역 후지산을 올라갔지만

나는 몇 미터를 남겨놓고 막차시간 때문에

내려오고 만다.


머릿 속에 남는 건 저 화살표와 구름 뿐이었다.


반추해본다.

실패한 등산도, 실패한 연애도, 실패한 직장생활도

집 안에서 고이 잠든 챙기지 못한 짐들까지.

내 욕심이 나를 지배하고 큰 머리와 하찮은 몸을 같이 움직이고자 했기에

역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 아닐까


아마 같이 온 친구가 없었더라면 진작에 포기하고

내려와서 후지산을 바라보며 술이나 퍼먹었겠지


괜찮아. 우리 잘했어. 쉽지않네. 그래도 재밌다 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내 후지산 산행은 나름 성공적이라고

감히 표현해본다.


다음엔 애인을 데리고 긴 호흡으로 이 곳을 다시 오리라 다짐한다.

아주 부셔버릴 작정으로 다시 올 것이다.


그 때는 의도하고 더 많은 짐을 놓고 가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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