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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이 다 우리 것이었던 제주

소중한 사람과 하루를 꽉 채운,

by 팬티바람


나는 먼저 여행을 하고

너는 조금 늦게, 잔뜩 짜증이 난 채

제주공항에서 만났지

퇴근 후에도, 연차 중에도 연락하는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던 너.


다음 날 우연히 발견한 유채꽃밭에서

피크닉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도착한 그곳.





지금도 거기가 어딘지, 이름이 무엇인지

글로 적을 수 있는 명칭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알아도 어떤 첫 문장으로 이곳을 설명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말과 말똥과 세상 제일 많은 유채꽃에

유일하게 둘러싸인 사람이었지


나는 살금살금 말똥을 피해서,

너는 유채꽃이 밟힐라 사뿐사뿐,

유독 노란색이 어울리는 발걸음.



내게 꽃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고

자연을 소중히 대하는 법을 몸소 보여준,

나는 너에게 늘 하루를 배운다.

하루의 소중함.


우리는 바람에 실려오는 말똥냄새를

살포시 맡으며 자리에 눕는다.

서로의 시야에는 서로의 옆면이 들어오고

반대쪽은 연기처럼 흔들거리는 유채꽃


얘는 키가 크고 얘는 힘이 없네

하나하나 애들을 바라보며 오지랖을 부리던 너.

날 좀 봐줘. 꽃 말고 나도 좀.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

나는 국자를 저으며 찐득한 떡볶이를 만들고

너는 유채꽃 자수가 들어간 앞치마를 두르고

열심히 빵을 굽자.

그렇게

제주도에 살자 다짐했다.


가끔 서핑을 타러 갈 것이고

너의 빵은 네가 다 먹어서

팔 수 있는 제품이 없을 것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격하게 공감하던 너.



동물을 좋아하는 내가 데리고 간

승마장에서 나보다 더 승마에 열심히 던 너.

왜 너의 말은 계속 똥을 쌀까

주인 뱃속에 똥이 가득 차 있을 거야.


한참을 달리다가 걷다가

아슬아슬 말과의 기싸움도 여러 번,

완주 뒤에 말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던 날.


숙소에 돌아와서 엉덩이와 허벅지가

뻐근하다던 너의 말.

너의 근육 허벅지와 엉덩이는 절대 아플 리 없어

바지 속에 옹고반점처럼 피어난 엉덩이 멍자국

허벅지에 유채꽃처럼 피어난 시퍼런 멍자국


웃어야 돼 울어야 돼 하다가 결국 웃어버린

멍 같은 하루.



맛만 봤던 수영장과

남은 고기를 찾아오는 강아지를

뒤로하고 순식간에 지나간 2박 3일

체크아웃 시간이 다 와가는데

모닝커피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내 손을 끌고 테라스로 데려갔지

난 늘 조급했는데

넌 늘 날 가라앉혀줬지

서로의 가속페달이

서로의 브레이크가 되어주던 우리.


심연에서 나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려준,

좋아 보였던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게 만든, 당신


22년 사진 속 제주의 우리를 보면

조금 울음이 나지만 아직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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