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읽고 있던 책을 책상 위에 두고 퇴근하는 바람에 뜻밖의 게으름 시즌. 읽을 책이 한 박스나 있지만 책을 여러 권 한꺼번에 읽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덕분에 제대로 앓고 있다. 무슨 예감에서인지 오늘 휴가를 냈는데 그냥 실컷 아프라는 신호였나봐.
원래대로라면 어제쯤 읽던 책을 마무리하고 기록을 빙자한 낙서를 써야겠지만 가끔 찾아오는 독서휴지기에 강제로 밀어넣어졌기에 커피나 마시며 몽상한다. 몽상은 기억이 시작될 무렵부터 친구. 말랑하고 향기롭고 나이들지도 않는다. 몽상과 놀 때는 나도 다섯 살 어린아이가 되어 마당이 넓은 집 라일락 나무 아래 다시 앉아있다.
바람은 향기롭게 불어온다. 바람은 스친 모든 것들의 색을 품고 달려와 내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어디론가 간다. 누군가 다른 이에게 닿았을 때 내 더운 숨냄새가 전해질까.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뒤채자 어제 저녁, 창이 환해지더니 천둥이 울었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일어나 창을 여니 사방이 물기둥이다. 물을 섬기는 신전에 들어왔구나. 이 계절은 대체 어디로 미끄러져 가나. 그렇게 창틀에 턱을 괴고 나는 황인숙 선생님의 란이를 생각한다. 지붕을 딛고 조용히 나아가는 고양이족을 생각하면 고양이를 섬기는 지상의 시인도 떠오르기 마련. "고단한 밤처럼" 걷는 고양이여, "너무도 고적해 보"이는 고양이여. 이 빗속에서 너희들이 무사하기를.
그리고 다시 누워 Ali Abbasi 감독의 <경계선>을 생각했다. 오래전 나는 이렇게 적어두었구나.
"그곳에는 꿈도 없는 잠과 빛나는 어둠이 일렁거릴까."
상념은 끝도 없이 미끄러지니 이만 나는 창을 닫아야 한다. 그 전에 오늘의 리스트를 적어드릴께요.
하나, 골목에서 고양이를 만나면 마음으로 안녕 - 하고 인사를 건네주세요
둘, 오늘 만난 처음의 꽃을 기억해 두었다가 고단한 어느 순간 꺼내어 향을 맡아보세요
셋, 지금 마시는 차가 향기롭다면 그 향기가 끌고 가는 어느 기억을 따라가 잠깐 머물러요.
넷, 아무 예고도 없이 불쑥 마음의 뚜껑을 열고 나오는 어느 장면, 어느 노래, 어느 문장, 어느 표정이 있다면 미소지어 주세요.
늘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당신에게 나는 어제의 아름다움을 선물할께요. 오늘 당신이 발뒤꿈치를 잡아끄는 그늘이 아닌, 풍성하고 향기로운 그림자와 함께 거닐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