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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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마음이 아니라 몸에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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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랫배에는 조금 긴 흉터가 있다. 고등학생 시절, 급성 맹장염으로 병원에 실려가 급하게 수술을 받은 흔적이다. 그날이 선거일이라 작은 병원들은 모두 휴원중이었고 실려간 종합병원 응급실은 그렇게 병원을 찾아 실려온 환자들로 북새통이었다. 혈관이 나오지 않아 양팔을 열일곱 군데 바늘로 찔러 겨우 링거를 달고 이동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갔다. 젊은 의사가 피곤한 표정으로 내게 노래 좀 불러보련? 이라고 했다. 생각나는 노래가 없어 섬집아기를 부르다가 잠이 들었다. 몽롱하게 깨어나자 입원실에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외할아버지가 의사와 간호사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맹장수술은 그냥 하는 거라구요, 라고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는 의사는 젊다 못해 어려 보였다. 동네에서 만났으면 오빠, 하고 부르며 길을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자애 배를 저렇게 만들어놓고 이제 어쩔거야? 아니, 무슨 의사가 수술을 하면서 절개를 제 손이 쑥 들어갈 정도로 해?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날 응급수술이 워낙 많아서 맹장수술 정도의 가벼운 수술은 레지던트들이 했던 모양이었다. 4-5cm 정도의 희고 볼록한 절개 흉터는 이제 포동한 뱃살에 파묻혀 나도 곰곰히 떠올려야 할 정도지만 수술이 갓 끝나고 배가 아물기까지, 그리고 상처의 붉은 기가 가시기까지 배의 흉터를 보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 흉터에 얽힌 기억은 단순한 수술 경험담이 아닌 사춘기 시절의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몸에 새겨진 흉터는 나와 함께 자라고 늙었다. 아직 젊었던 외조부모님과 엄마 직장 동료가 사다준 커다란 물개 인형, 정말 먹고 싶었던 병원 앞 분식집의 김밥에 얹힌 감정은 뜨겁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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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소한 기억 말고도 몸 여기저기 남은 기억은 깊고 아려서 흐린 날이거나 너무 맑은 날은 신경통으로 온다. 가계의 내력은 집집마다 달라서 깊은 밤 지붕 아래 누워 숨을 몰아쉬는 몸들은 저마다의 구름을 만든다. 갑상선 기능 저하증을 앓으며 야윈 몸으로 아이들을 끌어안으며 옥에 있는 남편의 기약없는 약속이 적힌 편지를 읽는 눈처럼. 그 눈이 만드는 눈물도 없는 슬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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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앓는 아비와 몸을 앓는 어미 아래에서 자란 아들의 몸에 새겨진 가계의 내력은 노랗게 피어나나 보다. 감정은 여러 얼굴을 품고 있어 예민한 사람은 제 감정을 마주하기도 무섭다. 이 시를 쓰기 위해 온몸의 흉터를 짚으며 기억을 불러냈을 시인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몸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