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대우림에 숨긴 황금잔과 같은 잠을 꿈꾸네
어려서부터 잠을 잘 자지 못하는 편이었어요. 잠이 드는데 오래 걸리는 날도 있고 잠은 수월하게 드는데 한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 깨는 날도 있어요.
차를 타면 존다거나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내게는 몸이 한계에 달해 스위치가 저절로 내려가 기절하듯이 잠들어야만 가능한 일.
습관적으로 일찍 불을 끄고 누워요. 입면장애가 아닌 날이라면 새벽에 계속 깨더라도 일찍 누우면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죠. 친구들은 편하게 약의 도움을 받으라면서 전문가들이 잘 조절해주니 의존증 같은 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요. 나도 잘 알죠. 그런데 불편한 것을 잘 견디는 성격이라 그런걸까요. 몸이 알아서 가끔 스위치를 내려줘서 그런걸까요. 아니면 잠이 오지 않는 밤이 내게는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요. 불면의 숱한 밤과 생존을 위한 기절같은 잠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그럭저럭 잘 버텨왔어요.
그런데 유난히 낯선 곳에서는 잘 자요. 여행을 가면 밤 아홉 시 부터 졸려요. 물론 뚜벅이 혼자여행을 주로 가니까 몸이 고달파서 그런 것도 있겠죠. 하지만 주로 한곳에 오래 머물면서 일정을 느슨하게 짜는 편이라 어느 날은 하루종일 풍경을 바라보며 멍할 때도 있어요. 그런 날도 잘 자요. 싱그러운 에너지로 가득 차서 더 푹 자요.
그건 내가 지금 길 위에 있기 때문일까요. 나의 불면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던 걸까요. 침대가 딱딱해도 이불이 무거워도 방이 조금 춥거나 더워도 심지어 방을 잘못 찾은 낯선이가 문을 덜컹덜컹 흔들어도 잠은 나를 끌어내려요. 꿈도 꾸지 않는 달콤한 잠. 난 숨겨둔 보물같은 잠으로 가라앉아 이대로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
여행의 매혹이 날 흔들어 깨우죠. 딱딱한 빵에 싱거운 스프라도 여행지의 아침은 맛있고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와글거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반짝거려요. 나는 반 걸음 물러나 그들을 바라보죠. 복잡한 생각이 없어서 좋아요. 여행지에서 만나는 모든 풍경은. 거기엔 순수한 인상만이 남아서 나는 기꺼이 풍부해지죠.
오래전 인도를 여행할 때 24시간이 넘도록 기차를 타고 움직인 적이 있었어요. 커텐 한 장으로 가려진 침대에서도 나는 잘 잤죠. 아침 일찍 일어나 느리게 흘러가는 창 밖을 보다가 문득 멍해졌어요. 사방에 아무 것도 없는 들판에 세워진 돌벽. 세 면의 벽과 지붕으로만 이루어진, 사람 하나 들어가 겨우 누울 수 있는, 문도 없는 좁은 공간. 거기에 누워 잠을 자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의 야윈 다리가 지붕 그늘 밖으로 나와 있었어요. 기차는 지나가고 나의 시선도 미끄러져도 그의 잠은 굳건했죠. 어쩌면 그는 눈만 감고 있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죽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기차에서 뛰어내려 달려가 만져보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지금도 그의 잠이 즐거운 잠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난폭하게 생각해요. 남의 생에 끼어들지 못하는, 관찰자의 시선은 그렇게 폭력적이에요. 나는 마음을 거기 두고 앓기 싫어서 그가 몸을 누일 곳을 찾아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거라고 제멋대로 믿어버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 장면은 선명히 남아 있어요. 나는 오래도록 떠올리겠죠. 야윈 다리와 더러운 발바닥, 선로 옆의 잠을.
그제는 들어야 할 웹라디오가 있어서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버텼어요. 방송이 끝나고 꾸벅꾸벅 졸면서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찬 채팅창에 안녕히 주무세요, 인사했죠. 그러면서 아, 이 채팅창도 어쩌면 여행지나 마찬가지야, 라고 생각했어요. 낯설지만 어딘지 모르게 친숙한 아이디로 가득찬 공간 - 우린 모두 멀리 떨어져서 키득거리고 감탄사를 뱉고 그리고 마지막엔 서로의 평화로운 잠을 바라면서 헤어지죠. 채팅창이 닫히면서 헤어지는 거니까 순식간에 창이 텅 비어버려요. 텅 빈 채팅창을 보다가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어요. 눈을 뜨니까 아침이더라구요. 그날도 여행지의 마음좋은 침대는 나를 잠으로 숨겨줬어요.
내가 빠져나온 공간은 저렇게 어지러워요. 나는 떠나고 저 침대는 기억할까요? 나의 뒤척임, 나의 잠꼬대,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꾸지 않았다고 믿는 어떤 꿈들을. 내가 머리를 기댄 베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나는 숱한 여행자들이 거기 남기고 간 잠의 축복을 받아 그토록 깊게 잠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여행지에선 우린 모두 친구가 되니까요.
어쩌면 여행을 닮은 당신의 일상에 나의 축복을 보내요. 충실한 낮을 보내고 밤이 오면 그윽한 잠이 깃들기를.
잘 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