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볼드윈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증오하는 것은 쉽다. 타락하거나 포기하는 것도 쉽다. 그건 그냥 자기 자신을 태우면 되는 일. 소진하는 일은, 망가지거나 망가뜨리는 것은 쉽다. 그건 어떤 의미로는 적의 얼굴을 닮는 일. 내 앞에 있는 저자의 행동을 거울처럼 따라 하면 충분한 일이다. 물리적으로든, 혹은 영적으로든.
용서하는 일은 그보다는 어렵다. 화해를 청하거나 나에게 가해진 폭력을 참아 넘기는 일도. 그건 상대에게 감명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개인적인 만족에 그치게 되고 불합리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이 주변이 조금 환해지는 것으로 해결되는 일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나를 억압하고 차별하고 나와 내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고 나의 여자 형제를 강간하고 나의 남자형제를 죽을 때까지 때리고도 '양심을 버린 지 오래'라는 말 한마디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이가 하나라도 피가 거꾸로 솟을 텐데, 그들의 나라에 함께 살아야 한다면 얼마나 비참할까. 순진무구한 아이는 태어나 부모로부터 자신을 없애는 법을 강요당한다. 자신을 없애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증오에 더해서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들은 적이라고 말한다. 이 맞닿을 길 없는 평행선에서 그는 문득 내려와 캄캄한 들판을 가로질러간다. 그의 손에는 횃불도 총도 꽃도 없다. 빈손으로 들판 가운데 선 그가 하는 일은 작은 돌을 들어 들판에 쌓는 일. 그는 성을 짓는다.
제임스 볼드윈의 이 두 개의 편지글은 오십 년 전에 쓰였지만 아직도 유효한 울림이다, 슬프게도. 아직도 '단지 흑인이라서' 대낮에 백인 경찰에 의해 흑인 청년은 살해당한다. 허울좋은 법과 규칙은 교묘하게 평등을 가장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생활의 본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뿌리 깊은 차별의식은 행동으로 터져 나오고 의식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정당화한다. 제임스 볼드윈이 안타까워했던 '백인의 무지함'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이었으며 성소수자였고 교회를 등지고 떠난 작가였던 제임스 볼드윈은 그의 형제자매보다 더 겹겹의 차별과 소외를 겪어야만 했다. 그는 말한다. 고통을 겪는 일이 좋지는 않지만 고통을 겪은 자는 스스로 삶에 대한 권한을 획득한다고. 고통을 겪은 모두가 그렇게 아름다운 결론에 이르는 것은 아닐 테다.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들어간 교회에서 그는 '백인 신'의 폭력적인 얼굴을 본다. 사랑과 복종의 대가로 보호를 주는, 너는 나의 사람이냐고 묻는 폭력을. 우린 모두 안다.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내몰렸을 때 우리는 기꺼이 누군가의 사람이 되고 싶다. 속하고 싶고, 보호받고 싶다. 이 불확실함에서 나를 지우고 싶다. 누군가의 사람이라는 유혹은 강력하다. 나를 내려놓고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을 받아들이는 것. 인생의 새로운 얼굴을 만났을 때도 두렵지 않다. 고민하고 상처받고 회복하면서 얻는 과정 없이 내겐 정해진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 물론 외부의 강력한 위협으로부터 도망친 자의 경우다. 자신의 의지로 종교를 찾아 자신의 의지로 신과 함께 나아가는 이도 많고 그것이 종교의 순기능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스스로 영혼을 의탁한 종교로부터 사랑을 찾는 이는 영혼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며, 폭력과 배척을 찾는 이는 그의 영혼이 그러한 것이니.
한없이 약하고 불안했지만 영특하고 섬세했던 청년은 자신의 의지로 아버지와 불화하고 교회를 떠난다. 그리고 흑인 무슬림 운동의 지도자 일라이자를 만난다. 그리고 거기서 또다시 흑인의 얼굴을 한 백인의 폭력을 만난다. 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열등하고, 백인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흑인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근거 없는 차별과 분노 어린 배척을. 그건 평생을 소외받고 고통받아온 이에겐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지만 역시나 제임스 볼드윈은 돌아서서 나온다. 그는 백인 친구와 저녁식사 약속이 있다. 사람과 사람으로 동등하게 만나는, 피부색에 연연하지 않는 좋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함께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아메리카 니그로 -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인 흑인은 특별하다. 말콤 엑스가 주장한 것처럼 모든 흑인은 그의 성을 거부하고 싶다. 지금 미국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흑인의 성은 아메리카로 끌려온 그의 조상을 소유했던 노예주의 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을 엑스로 지우고 돌을 들어 올려 백인의 얼굴을 찍어내리고 저주의 말을 쏟아붓고 그들의 나라에 흑인만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옳은가.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면서 함부로 살해당하고 강간당하고 식당에서 대중교통에서 거부당하고 대학교육을 받아도 일자리를 잡지 못했던 1960년대라면 더더욱 모두가 분노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리라. 피를 흘린 만큼 대갚음해 주고 싶으리라.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옳지도 않다. 증오와 차별, 배척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나를 겨누고 있는 총구에 꽃을 꽂을 수는 없겠지만, 나를 때린 주먹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적 승리감에 도취해 그를 용서한다고 되뇌는 것도 해결책이 되진 않겠지만.
입을 열어 공존을 제안하는 일. 우리가 함께 여기서 살 수 있는 내일을 건설하기 위해 교감하는 일. 누구도 덜하거나 더한 것 없이, 양보하지도 않고 베풀지도 않으며 완전한 파트너로서 동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라를 만드는 일. 그것을 위해서는 잠시 감정을 멈춰야 한다. 움켜쥐고 있는 손을 풀면 마주 잡을 수 있는 손이 생긴다. 이건 인간이 지구에 나타난 이래 계속 도전하고 있는 일. 영혼의 과제. 인류의 커다란 카르마다. 아직도 누군가를 차별하면서 스스로를 드높이는, 나약한 영혼들이 도처에 어슬렁거리는 인간의 세상에는.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더더욱 증오는 깊어지고 있다. 길을 걸어가는 무고한 아시아계 시민들이 폭행당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2021년 지금도 역시 그렇다.
하지만 기억해보면, 증오 - 미움이라는 감정은 뜨거워 우리를 활활 태운다. 폭력은 피를 달군다. 더 강한 자극을 원한다. 그렇게 타오르면서 무너지고 망가진다. 기쁨 - 사랑이라는 감정은 우리를 채운다. 환하고 아름답게 한다. 그렇게 빛나면서 강해진다.
우리가 살아야 할 어떤 나라가 있다면 그건 증오-미움의 법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기쁨-사랑으로 움직이는 나라여야 한다. 평생을 가족에게서 외면받고 태어난 나라에서조차 살 수 없었던, 추방당한 청년이 저 캄캄한 들판에 조심스럽게 쌓은 저 돌 하나. 저 주춧돌을 우리는 찾아가야 한다. 모두가 이 들판을 가로질러 작은 돌 하나를 집어 들자. 우리가 살아야 할 성을 쌓자. 우리의 나라를. 인간의 나라를. 진정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지상의 천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