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현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

by 별이언니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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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것은 인상이 흐리다. 자연스럽게 스민다. 그것은 숨 쉬는 공기, 가만히 두근거리는 심장, 시키지 않아도 활짝 펼치고 오므라드는 나의 날개 폐.

피는 빠르게 달려 몸 곳곳으로 산소를 운반하고 덕분에 나는 썩지 않고 눈을 말똥거리며 앉아있다. 고맙다, 이 모든 것들을 나는 순간순간 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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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도 마찬가지다. 사랑도. 그것이 사라지면,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깨달으면 몸이 아플 거면서, 마음이 조각날 거면서 - 어느덧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고 만다. 이 위로 없이도, 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자신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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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는 밤에 시집을 읽는다. 흐려서 피곤한 낮에 강아지를 어르며 시집을 읽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아름다운 미색의 시들은 얼마나 고요한가. 분명 누군가의 사랑일, 나의 위로가 된 이 시들은 투명하고 맑아서 손에서 놓으면 사라질 것 같다. 조금만 잊어도 공기에 뒤섞일 것 같다. 나를 둘러싸고 있지만 내가 만질 수 없는 어떤 목소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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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어떤 아픔을 만나면 한나절 그저 가만히 옆에 앉아만 있어줄 것 같은 시. 내가 여기 있어요, 따뜻한 체온을 은은하게 풍기며 시린 곁을 조금씩 녹일 것만 같은 시. 그런 시는 눈도 밝아서 아픔을 잘 만나고, 발이 느려서 지나치지도 못한다. 속이 깊은 시의 우물엔 얼마나 많은 눈물이 고여 있을까. 달이 밝은 날이면 우물 밖 무서운 숲을 떠올리며 벌벌 떠는 눈물을 감싸 안느라 -

시의 눈엔 항상 눈물이 고여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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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의 마을은 매일 축제라 화려한 분장을 한 쓸쓸과 감탄과 점잔과 절규와 가난과 매혹이 어지러운데, 조그만 의자에 앉아 가만히 광장을 바라보고 있던 이 맑음을 만난 것은 어떤 이끌림일까. 나도 시 옆에 나란히 앉아 가만히 한낮의 광장을 바라본다. 손에 땀이 차고 어지럽다. 달려가 이름을 말하고 치마를 활짝 펼쳐 인사를 하고 싶다. 저 색색의 향연에 나도 끼여 부대끼다가 사라지고 싶다. 불량식품 같은 인상을 너에게 주고 싶다. 하지만 -

네 혓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사라지는 것보다 그냥 머리맡의 사기그릇, 찰랑거리며 담긴 자리끼처럼 마른 입을 부시고 적시며 네 아침을 깨우고 싶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기 있지만 손을 뻗으면 순하게 끌려와 또 가만히 머무르고 싶다. 네 둥근 어깨에 손을 올리고 먼지 부연 풍경을 함께 바라보고 싶다. 아니, 바라보고 있다고 - 늘 곁에 있다고 속삭이고 싶다. 나의 언어는 눈물이 많지만, 나의 언어는 다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윽고 네가 일어나 신을 고쳐 신고 길을 나서면 그 뒷모습을 보고 나는 한없이 쓸쓸하겠지. 너는 명랑하게 길을 걷겠지. 언제나 그렇듯 광장의 아름다운 것들이 너를 둘러싸고 환호할 테니, 나는 그것으로도 기쁘겠지.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떠올려주세요. 아, 거기, 쓸쓸한 마당 한편에 꽃이 피어 있었지, 색도 모양도 잘 떠오르지 않지만 - 그렇게,

뒤돌아 보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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