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orian Zeller <The Farther>

by 별이언니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
나뭇가지에 비인지 바람인지

집 문제로 고생했는데
이제 내 몸 하나 누일 곳도 없어
그래도 내 시계 하나는 손목에 찼지
멀리 가야 하니까
준비가 된 건지


옷 갈아입고
공원으로 산책 갈까요?
나무랑 잎사귀도 보고
돌아와서 맛있는 것 먹어요
그리고 나서 낮잠도 주무시고요
그리고 기분이 좋아지면 또 산책하러 나가요
둘이서 오붓하게, 오늘 날씨가 좋거든요
화창해요
화창할 때 많이 걸어다녀야죠
화창한 날씨는 오래 안 가잖아요

곧 기분 괜찮아져
날 믿어봐
다 괜찮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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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소니는 혼란스럽다. 딸의 얼굴은 수시로 바뀌고 고약한 사위도 마찬가지다. 딸은 평생의 사랑을 만났다며 파리로 떠나겠다고 눈물을 흘리다가도 저녁 장을 봐서 식탁을 차리며 퉁명한 사위의 잔에 와인을 따라준다. 간병인들은 시계를 훔치지만 딸은 시계를 욕실 선반에서,찬장에서 찾아다 준다. 어두운 방에서 커텐을 걷고 내려다 보는 거리 풍경은 비슷한 듯 다르다. 그러나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장소. 이곳은 안소니의 집. 평생에 걸쳐 손에 넣은 집이다. 애교가 많고 어여쁘지만 어쩐지 연락이 도통 되지 않는 둘째딸 루시의 그림이 벽난로 위에 걸려 있다.


시간이 흘러가도 사건은 나아가지 않는다. 침대에서 눈을 뜨면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어딘지 낯익다. 바깥 풍경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기라도 하는 듯 온집의 커텐은 묵직하게 쳐있다. 좁은 복도엔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있고 안소니는 와인을 마시며 늘 듣던 음악을 듣는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이상한 것은 안소니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가 아니라고 한다는 거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손목 위의 시계 뿐. 그것은 항상 정확한 시간을 알려준다. 하지만 시계조차 자주 사라진다. 시계는 안소니가 붙잡고 있는 추, 일상에 내린 닻이다.


둘째딸을 닮은 간병인에게 안소니는 자신이 머리가 좋아 세세한 것들을 다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 총명함이 문제였을까. 안소니의 집은 천천히 비워진다. 그림은 내려지고 그림이 걸린 자리만 남는다. 루시가 그린 그림마저 사라지자 안소니는 분노에 몸을 떤다. 큰 딸 앤이 문제야, 이 집을 차지하려고 하지.


평생을 쌓아올린 기억이야말로 진정한 집이 아닐까. 기억은 사라지기도 하고 묽어지기도 하고 미화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억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온 자취이므로. 그 집엔 사랑하는 사람이 남긴 낙서, 마모되고 부서진 책상,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한 의자 손잡이가 있다. 하나하나 내 몸이 겪은 무엇. 안소니의 집은 점점 비워지고 텅 빈 복도만 남는다. 그리고 -.


우리의 일생에 화창한 날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차를 마시며 창밖을 보고 오늘의 날씨를 점친다. 화창한 날엔 나가서 걸어야 한다. 빛나는 햇빛은 기적이니까. 집은 사라지고 내 몸 하나 누일 곳 없는 인생의 말미에 이르러 무섭다고 떨면서 우는 안소니의 손을 잡으며 간호사는 말한다. 옷 갈아입을까요? 산책하러 가요. 이제는 어떤 풍경 속에서 누구와 대화를 하더라도 곧 지워져버리고 마는 안소니지만, 안소니의 집은 사라지고 호텔식 요양병원이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되어버렸지만 - 곧 지워질 기억이라도 화창한 날을 만난다면 신발을 신고 무화될 기억속을 터벅터벅 걸어야 한다. 골격만 남은 집이 이윽고 무너지고 사람들이 눈물을 쏟으며 장미를 던질 때까지. 생이 너무나 무거운 걸음을 옮겨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물에 젖은 듯 녹초가 되었지만 안소니가 눈물을 멈추고 화창한 날씨 속으로 산책을 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산다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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