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bel Coixet,<The Book Shop>

by 별이언니
그 누구도 서점에서는 결코 외롭지 않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헤아릴 수도 없는 우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머물러 서로를 알게 된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렇게 맞닿은 손에서 우리는 종종 큰 선물을 받곤 한다. 인간에 대한 선의, 순수에 가까운 용기 같은 것.


영화는 시종일관 한톤 가라앉은 색으로 바람이 부는 바닷가 풍광이나 책이 가득한 서점을 보여준다. 연인들이 투닥거리며 걷는 길은 자갈투성이고 인간혐오에 빠져 난롯가에서 책만 읽는 은둔자가 사는 저택은 묵정밭 한가운데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 심지어 그렇게도 사악한 보통 사람들의 의지가 흘러넘치는 소읍인데도 - 나는 자연스러운 빛이 창틀을 넘어 발등에 떨어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그건 플로렌스의 선의, 인간을 의심하지 않고 인생을 믿는 마음, 그래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이어나갈 수 있는 용기와 결의가 영화 전반에 걸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는 크리스틴에게만 선물을 준 것이 아니었다. 차가운 화면 너머, 기계로 송출되는 빛과 소리로도 나는 플로렌스에게 감화되었다.


어린아이가 봐도 훤히 보이는 악인에게도 마음을 열어주고 자기 공간을 내어주는 넉넉함, 그이가 공모한 사기극으로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담담히 왜? 라고 묻는 간결함(그녀는 정말 궁금했을 게다. 인간이 한 인간에게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그건 그녀가 사랑하는 문학 - 세상의 모든 책들이 끝까지 궁금해하는 비밀이므로. 문학은 인간의 일. 그러므로 문학은 인간을 궁리한다.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음모가 단두대의 칼날처럼 여리고 가냘픈 그녀 위로 떨어져도 그녀는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꽉 차 있던 서가는 비워졌지만 크리스틴에게 꼭 읽어보라고 했던 책은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올드 하우스에 마음을 두고 떠났다. 그 장소를 둘러싼 인간들은 깃털같은 시간의 가벼움에도 아둥바둥거리지만 기와가 무너지고 지하실에 습기가 차도 그 오래된 집은 플로렌스의 잠과 책을 지켜주었기에. 그녀는 정겨운 목소리로 'My Home' 이라고 부른다.


우리 모두 그런 순간이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인생의 방향이 영영 달라지는 일. 마음의 결이 무늬를 새로 그리는 일. 그건 사랑이기도 하고, 우정이기도 하고, 시선의 감화이기도 하다. 만난다는 기적에서 서로를 안다는 기적, 그리고 말이 닿고 마음이 이어지는 기적. 크리스틴은 플로렌스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영영 달라졌다. 크리스틴이 피워올린 봉화 - 플로렌스는 차마 생각하지도 못했을 직접적인 복수, 응징의 매캐한 연기 - 는 최소한의 정의 실현이다. 물결에 떠밀려 멀어지는 플로렌스는 크리스틴으로부터 그 순간 무언가를 건네받았을까. 그 시간 이후 그녀의 선의와 용기, 순수에 단호함이라는 미덕이 더해졌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서점에서는 외롭지 않다. 'Never' 라는 말의 무거움을 플로렌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올린다. 향긋한 마멀레이드를 갓 구운 빵 위에 올리듯. 신간을 진열하듯. 언덕 위 독서가에게 보낼 추천도서를 포장하고 정성스러운 편지를 쓰듯. 그건 그녀의 신뢰, 인생과 인간에 대한 다정함이다. 회의에 가득차 지친 눈으로 액정 너머 멍하니 앉아있던 나도 마음이 술렁일 만큼. 백발이 된 크리스틴이 서점의 불을 끄고 화면 너머로 사라질 때 잠깐 보여준 미소를 보았기에. 좋은 책은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킨다. 그러니 우리 누구라도 서점에서는 외롭지 않다. 스카프를 새로 매고 바람부는 바닷가를 지나 무정한 연인의 집을 지나 세상을 버린 자의 언덕을 가로질러 교활한 사람들의 마을에 자리잡은 저 외롭고 푸른 서점으로 가자. 올드 하우스 북샵. 해풍에 무너지는 나무들이 인간의 마음을 감싸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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