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이야기

어디나 있는 계단

by 별이언니

행복한 것, 자연스럽게 번지는 웃음, 화창한 날씨, 깨끗한 신발, 잔잔한 대화에도 호기심을 느끼긴 한다. 예민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에 상상의 씨앗을 심고 제멋대로 발아해 무성하게 꽃과 이파리를 여는 나무를 관찰한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작품들이 종종 발현한다.


하지만 보다 비옥한 토양은 눈물이다. 슬픔, 경련하듯 발작적으로 터지는 웃음, 통증, 병, 우울, 눈물, 낡은 집, 맞은편 버스 정류장에 앉아있는 남자의 어두운 얼굴. 화창하게 피어난 꽃이 바닥에 이루는 그늘의 무더기. 어둡고 습하고 슬픈 것들은 마음을 건드린다. 무언가 말하고 싶게 한다.


01.

여자는 아이를 재운다. 아이는 오늘도 말한다. 도레미 계단에서 더 놀고 싶어요. 여자는 겨우 웃으며 아이를 도닥인다. 오늘은 늦었으니 이만 자자.


도레미 계단에서 놀고 싶어요. 아이의 눈은 초롱초롱하다. 잠이 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 우리집 계단은 왜 노래해요? 어린이집 계단도, 지하철역 계단도 노래하지 않는데 왜 우리집 계단은 도-레-미- 하고 노래해요?


여자는 웃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아이는 여자의 손을 잡아끌며 집요하게 묻는다. 여자는 아이를 덮고 있는 이불을 고치며 중얼거린다. 착한 아이한테만 들리는 노래인 것 알지?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안돼. 이건 너하고 엄마하고 둘만의 비밀이야.


아이는 불만스럽다. 자랑하고 싶어요. 우리집엔 노래하는 계단이 있다고. 가늘고 예쁜 목소리로 도-레-미 노래한다고. 계단을 올라가면 도- 또 한 계단 올라가면 레-미-. 계단이 딱 3개라 아쉬워요. 대문턱이 조금만 더 높다면 계단은 파-솔-라-시 더, 더 높이 노래할텐데.


그런데 왜 솔이가 올라가면 노래하지 않을까요? 꼭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한테만 노래해줘서- 아이는 만족스럽게 웃는다. 아이의 눈이 천천히 감긴다. 나는 도-레-미 계단이 너무너무 좋아요.


계단-.


계단은 서랍같다. 소중하게 간직했던 것들을 숨기고 모두 잊어버리지. 왜 계단 아래 그걸 묻었겠어. 아니, 왜 계단 아래 그걸 묻었을까. 매일 그 위를 지나가야 하는데, 매일 그 위로 나의 폐와 심장과 혈관의 덩어리가 스쳐가는데, 매일 발자국을 남기는데, 매일 그림자는 조금씩 길어지는데. 왜 그랬겠어. 밟아서, 밟아서 저 땅 밑 깊은 곳에 영원히 가둬두고 싶으니까. 비밀이 온전하게 비밀로 남아있는 오늘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데 왜 계단은 노래를 하는 걸까. 그건 자장가. 무성하게 피어나던 그날의 꽃나무 아래 끔찍하게 계속 불러주던. 왜 자장가를 부른걸까. 차라리 잠들라고 하는걸까. 무서우니까, 눈을 감고 꿈속으로 떨어지라고. 눈을 뜨면 이 모든 것이 악몽이었다고 툭툭 털어내고 다시 저 환한 대낮으로 걸어가라고 나를 배려한 걸까. 태엽이 고장난 오르골처럼,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흠흠 허밍으로 자동재생되던 노래를.


손가락은 부드러운 벌레같았어. 조그만 배 위에 뺨을 올려두면 꾸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 사람이란 신기하지. 결코 고요하지 않아. 소리를 가둔 보물주머니처럼 저렇게 환한데 저렇게 단단히 밀봉되어 있지.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안전한 감옥.


여자는 매일 저녁 계단을 올라 대문을 열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를 지나 현관을 열고 노을이 엎질러진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고 싶지 않지만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 까르륵 웃으며 달려나와 여자의 치마에 매달리는 아이가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벌레 같은 손가락이 여자의 손가락을 잡는다. 엄마, 계단은 아직도 노래해? 예쁜 목소리로 도-레-미- 잘-자-라,


노-래-해?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아이를 바라본다. 엄마를 올려다보는 하얀 밀떡같은 저 천진난만한 얼굴을. 응, 노래하네. 그런데 넌 왜-


여기 있는 거니...? 왜 자꾸만 돌아오는 거야?


02.

비밀이 없는 계단은 없다. 결혼반지, 찢어진 사진, 잃어버린 편지, 유행이 지난 립스틱, 누군가 흘리고 간 손가락뼈. 무언가 숨기지 않으면 계단이 아니다. 누구나 한번쯤 계단을 내려가다 아득해진 적이 있지 않은가. 발목뼈를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흠칫 몸을 떤 적은? 당신은 지금 인류가 태어난 이래 가장 두꺼운 분실물 목록 위에 있다. 누구에게도 공개된 적 없는, 누구나의 분실물이다. 한번도 도굴된 적 없는 무덤이다.


03.

저녁이 오고, 창문마다 하나 둘 불이 켜진다. 낮에는 결코 눈치채지 못했던, 모서리에 웅크린 어둠이 드러나는 시간. 불빛 아래서 우리는 편안하게 몸을 눕힌다. TV를 보거나 밥을 먹거나 머리를 말리거나-. 방안에 함께 머물고 있는 어둡고 침침한 모서리들이 가만히 미소짓는다. 안녕- 오늘도 잘 지냈니- 등 뒤에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며 대답한다. 응-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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