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법당 앞을 떠나고 난 뒤였다. 아주 먼 데서 종들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저물어가는 빛 속에서 나무에 매달려 있을 그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자들이었다. 죽어서도 편안히 몸을 눕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새로운 세상의 경계를 새롭게 엮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세상에서 버려진 자들이 세상의 끝으로 밀려나 세상의 시작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먼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단다. 바다는 멀리 흘러가 지구의 끝에 다다라 끝없는 어둠 속으로 쏟아졌다고 믿었다. 상상해 보면 그건 정말 신비로운 풍경. 캄캄한 우주에 놓인 수반에서 신선한 물이 흘러내린다. 영원히 샘솟는 물이. 그러나 눈부시게 빛나는 포말 속에는 휩쓸려 사라지는 생명들이 있을 테고 굉음과도 같은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연약한 비명도 있었을 테다. 세상의 끝.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모든 것이 무가 되는 경계가 있다는 말이니. 더 이상 나아갈 무엇도, 이어질 무엇도 없다는 말이니.
하나시는 어쩌면 평평한 지구와 같지 않을까. 찬란하게 빛나는 고층 빌딩 숲 사이엔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절명 직전의 짐승처럼 무허가 판자촌들이 있고 거기에선 매일 사람이 사라진다. 사람을 삼키는 암흑을 거슬러 올라가면 재의 사무실이 있다. 재. 불이 삼키고 토해놓은 만물의 공통된 형상. 폐허의 이름. 폐허는 재생의 봄을 이야기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0'는 그야말로 끝이다. 피로 얼룩진 저수지에 캐리어를 던져 넣을수록 0는 가까이 온다. 재는 부활의 세례를 주듯 새로운 이름을 하사하지만 그건 이미 죽은 자들의 인두겁이다. 죽은 자들의 이름을 뒤집어쓸수록 '나'는 사라진다. 그렇게 계속 지워진 자는 아마 죽음이 찾아왔을 때 쉬이 움켜쥔 손을 놓을 수도 있겠지. 그것이 재의 가르침이다.
재를 거역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재에게 죽임을 당하던지 재를 죽이던지 아니면 재가 되던지. 그러나 아무 희망도 없이 세상의 끝으로 밀려나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경계 너머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죽은 자들이 주렴이 되어 지켜주고 있는 나라. 사라진 자들의 조그마한 마을. 바람이 불면 종이 울린다. 죽은 자들의 머리 위에 달린 종이 새처럼 운다. 죽는 순간조차 사력을 다해보지 못한, 사는 내내 피로했던 이들이, 이름도 없는 이들이, 아무도 찾지 않는 실종자들이 맑게 운다. 그건 흡사 수호문 같기도 하고, 기도 같기도 하고, 호명 같기도 하다. 저 환락의 도시에선 지워진 이름을 정성스럽게 다시 불러주는 일.
그들의 부엌에선 밥 짓는 내음이 나고 해는 가울가울 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