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신의 고독을 증명하려 떠나는 클라우스의 시선에서 내용을 전개하다가, 어느덧 광기 어린 여자가 되어 있는 이모를 발견하고 놀랐다. 한 사람의 고독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한 사람은 광인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쓰는 일이 졸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밖에 쓸 수 없어 괴로웠다.”
언젠가 꼭 남북통일에 대해 써보라는 이모의 말은 상투적이다. 그러나 '서독이모' 의 발화로는 전혀 상투적이지 않다. 삶은 '알 것 같다는 착각'과 '끝내 알 수 없다는 막막함' 이다. 타인을 마주대하는 일은 맑은 벽을 더듬는 일. 그러니 타인을 쓰고자 하는 일은, 그토록 내밀한 일은 가능할 리 없다. 조각난 사실들을 모아도 퍼즐은 완성되지 않는다. 완성된 것은 커다란 구멍 뿐이다.
지난 여름엔 포도를 먹고 빈 접시를 바라보며 시를 썼다. 완성된 시는 포도도 접시도 아닌, 나도 모를 어떤 것이었다. 시는 아름다워서 나는 가끔 꺼내보고 슬픔에 잠긴다. 아름답지만 알 수 없는 것, 내가 썼지만 닿지 못한 것, 그래서 자꾸 흰 종이를 끌어와 머리를 대고 멍한 것. 쓰는 일은 영혼의 내면을 핥는 일. 그러니 온전할 리 없다. 절대로 성공할 리 없다.
그러나 기어이 쓰는 일은, 첫번째 페이지에서 두번째 페이지로, 지난한 여정을, 수십 갈래의 길을, 아무도 모르는 안개 속으로 손을 뻗는 일은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건 끝끝내 알아내겠다는 욕망도 아니요, 이해하겠다는 오만도 아니다. 다만 내 앞에 잠잠히 서 있는 맑은 벽을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면 그건 사라져버린다. 그러면 벽이 아닌, 무너진 경계라는 허구가 생기고, 누군가의 침실 서랍을 뒤져 피임약과 콘돔을 전시하고, 매일의 아침식탁을 관람료를 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된다. 쓰는 일의 윤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치열한 방식으로 쓴다. 도저히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수한 실패라는 것을 알면서도 쓴다. 인간을 쓴다. 내가 모르는 인간을. 결코 통합될 수 없는 어떤 삶의 연결을 목도하고 무너뜨린다. 우리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이상은 때로 그 무게로 생활을 압살한다. 작가는 차가운 슬픔으로 무너진 생활의 폐허를 기록한다. 드라마트루그로서. 가장자리의 관찰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