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사라진 세기를 살면서
일곱 세기
아홉 세기 후의 사람까지 미리 용서하면서
걸었습니다”
<맨발로 성당들 사이를> 중
교복을 입던 시절엔 마흔이라는 나이가 무섭고도 위대해 보였다. 서른만 되어도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슬퍼하던 노래도 있었고. 어른들의 삶이 결코 완전하지는 않다는 걸 알아서 더 그랬을까. 대학만 가면, 어른만 되면,이라는 말에 쉽게 속지 않았다.
왜 마흔이 무섭고 위대했을까. 어리석게도 어린 나에겐 그것이 바라볼 수 있는 지평의 최대였던 거다. 마흔이 되면 삶의 형태가 고착된다고 믿었다. 그때부터는 만들어진 형태로 서서히 부스러질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른과 함께 살면서도. 가족은 그렇게 애달프고 막연한 것,
마모되는 삶은 나이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 알게 되었을까. 질문이 사라졌을 때 사람의 시계는 멈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삶은 관성의 찰나를 지나고 있을 뿐. 버스는 멈췄고 가속에 밀린 몸은 천천히 되돌아오고 있을 뿐이다. 발 위로 발목이 서고 무릎이 서고 골반이 서고 척추가 서고 목이 서고 이윽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어떤 풍경을 바라볼까.
스무 살 때는 내 안에 노파가 산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소녀가 노래한다고 느낀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날것의 하늘에 대고 묻는다. 이 풍경은 무엇인가요.
재해와 환란의 세상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것은 잠들지 말라는 신호이며 토막 나고 이어지지 않는 말이라도 끝없이 건네라는 경고다. 젊은 시인은 숱한 이름을 부르고 묻고 또 묻는다. 맥이 잡히지 않는 말들이 날뛴다. 건강하게 활발하게.
끝끝내 마주 보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