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말해줘야 하거든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긴 건지. 완전히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설명해 줘야 해요. 아이에게는. 그러려면 배우는 수밖에 없어요. 내 아이는 어쩌면 손을 들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렇게 됐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자기가 엄마 말을 안 들어서 그렇게 됐다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이죠. 나한테 미안해할지도 몰라요. 또 우리 엄마는요. 우리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나는 배우고 죽어서 아이와 엄마에게 얘기해 줘야 해요. 그런 게 아니라고.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내 아이는 그걸 모른단 말이에요.”
지도에 점 하나를 찍고 저 멀리 또 하나의 점을 찍는다. 점에서 점으로 가는데 가장 빠른 길은 무얼까. 평평한 지도 위에선 망설임 없는 직선이 정답이다. 그러나 점과 또 저 멀리 점이 우리의 지금 여기에 있다면 어떤 길이 최단경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배워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 맵이 제대로 업데이트가 되어서 횡단보도가 맵 위에 표시되어 있었더라도 아이는 죽었을지 모른다. 애영의 엄마가 서랍 속 콘돔을 잊고 살았더라도 아이는 태어났을지 모른다. 무언가에 닿기까지의 일들은 아무도 모른다. 삶은 그렇다.
한 사람이 한 사람에 닿는 일, 타인의 삶에 다다르는 일은 알 수 없는 경로를 따라간다. 하늘의 별을 이어 형체를 만들고 이름을 붙였던 고대인들은 막연했어도 행복했다. 명료하게 이어진 길은 사람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그 길이 과연 안전할까. 맵대로 운전하던 사람은 애영의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진혁은 애영과 사랑을 나눌 장소도, 사랑을 나눌 시간도, 사랑을 나눌 이유도, 그리고 사랑이 맺은 결실에도 모두 자기 발로 닿지 못했다. 손목을 잡혀 끌려왔을 뿐이고, 선택을 해야 할 시간에 침묵을 택했다. 그는 막연했고 의뭉스러웠다. 아이를 돌보고 여자를 사랑하는 대신 아이에게 곰인형을 보내고 아이의 옹알이를 몰래 송출했을 뿐이다. 그래서 진혁의 노드는 행방불명이며 바다 한가운데에서 깜빡이다 사라진다. 길을 의심하여 한자리에 머물렀지만 그것조차 답은 아니었던 셈이다.
애영은 아이에게 닿는 길을 모색하고 애영의 벗들은 그런 애영에게 닿는 길을 궁리한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관찰자이다. 서로에게 닿는 길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이의 경로를 바라보고 따라 하고 이해하는 일. 스파게티 코드로 범벅이 된 알고리즘은 아름답지 않겠지만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뒤엉킨 길은 오랜 고민으로 이룬 그이만의 방법이다. 삶은, 결코 단정한 코드가 아니다. 모두의 최단경로는 다르다. 비활되고 휴면되어 이윽고 삭제되는 데이터 너머에 진짜 삶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계단이 있다. 여름이면 그 계단 아래 서서 오래 바라보곤 한다. 계단 위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지나다 계단을 오르는 종아리를 보았다. 눈부시게 빛나는 종아리였다. 여름 한낮, 땀을 훔치며 계단 아래 서서 종아리가 끌고 올라간 어느 길을 상상한다. 내가 닿을 수 없는 타인의 삶이 저기 멀리 점멸하고 있다. 그건 슬프고도 아름다워서 한동안 걸음을 옮길 수 없다. 나는 돌아와 종이를 펴고 점을 찍는다. 푸르게 번진 점을. 그리고 종이 위로 최단경로를 찾는 알고리즘을 설계한다.
그걸 시라고 불러도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