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글 이우일 그림,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by 별이언니


구멍을 보면 궁금하다. 저 구멍 안은 어떨까, 저 구멍을 통과하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그래서 고대인들은 땅속 세상을 기록했고 앨리스는 토끼굴에 빠졌고 양사나이는 직접 판 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저주를 풀기 위해서. ​


구멍에 빠지면 구멍 밖으로 나와야 한다.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게 흘러간다. 구멍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여러 조건이 주어진다. 똑바로 앞을 향해 걸어가시오, 구멍 밖으로 완전히 나갈 때까지 절대 뒤돌아보지 말 것! 남자는 뒤돌아보고 아내는 비명도 흘리지 않고 다시 망자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니 어떤 미션이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성실하게 수행할 것. 저주를 풀기 위함이니, 음악을 작곡할 수 없는 것은 둘째치고 양사나이가 더 이상 양사나이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남은 크리스마스들을 살아갈 수 있겠어?​


아기 예수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크리스마스의 빛나는 별 아래 태어났고 성 양 어르신은 정체 모를 구덩이에 빠져 크리스마스이브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크리스마스이브에 구멍이 뚫린 음식을 먹는 것은 양사나이라면 할 짓이 아니다. 속죄의 의식은 난장판이 된 바다 까마귀의 집을 청소하는 것일까. 시름에 겨운 꼬불탱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걸까. 숲의 소녀들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고 부끄럼쟁이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일까.​


크리스마스는 그것으로 충분. ​


성 양 어르신에게 바칠 노래를 짓는 일보다 더 값진 일. 양사나이에게 근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이 주어진 것은 마땅하다. ​


1월에 12월을 생각하며 책을 덮는다. 올 크리스마스에 나는 어떤 구멍에 빠질까. 벌써부터 흥미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