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억이 피로 뒤덮여야 할 거다. 우리의 기억이 연꽃처럼 피의 수면 위를 떠다녀야 할 거다.”
1692년, 현재 댄버스라고 불리는 미국의 세일럼 시에서 마녀재판이 열렸다. 세라 굿, 세라 오즈번, 그리고 스스로 마녀임을 인정한 티투바가 체포되며 시작된 피의 광풍은 열아홉 명의 몸을 허공에 전시했고 한 남자를 압살했다. 세일럼의 마녀재판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지금도 재판 기록을 뒤진다. 인간의 악의가 연출할 수 있는 최고의 퍼포먼스로 고발은 이어지고 사람들은 고문당하고 죽어갔다. 오늘의 고발자가 내일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 '스스로 죄를 인정하기까지 했지만' 이름 외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마녀가 있다. 티투바, 흑인 노예였다. 티투바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흑인이었고,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 기록된 티투바의 이야기는 모두 작가의 상상이다. 또한 배척당하고 억압당했던 '흑인, 여성, 노예'의 실제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어머니가 영국인 선원에게 갑판 위에서 강간당하며 잉태된 티투바는 그 어머니가 백인 농장주에게 강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칼을 휘둘러 서툰 자기방어를 했다는 이유로 목이 매달려 죽는 광경을 목격한다. 흑인이었지만 노예가 아니었던 티투바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만 야야에게 거두워져 은밀한 지식들을 전수받는다.
이런 시작이라면 보통 두 가지 정도의 선택을 할 수 있을 듯하다. 남자를 멀리하며 홀로 살거나, 노예가 되는 것만은 최대한 피하며 가난하지만 자유롭게 살거나. 그러나 티투바는 이 둘 모두를 선택하지 않는다.
감옥에서 만난 헤스터(주홍 글씨의 헤스터가 맞다)처럼 비아냥거리지 않더라도 나도 티투바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머니의 보랏빛 혀를 본 아이가 사랑의 정념에 쉽게 불타오를 수 있나. 그 사랑이 자유민인 자신을 노예로 예속시키는 길일지라도.
게다가 존 인디언은 정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고달픈 삶을 함께 나아갈 사람은 아니었다. 티투바는 존 인디언의 외모에 홀렸다. 그것만은 저세상으로 건너간 위대한 검은 마녀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사랑했던 남편은 티투바가 마녀로 고발당하자 아내를 버리고 백인 과부 농장주의 침대로 들어간다. 좋은 옷을 입고 열성적으로 사람들을 고발한다. 믿고 보살폈던 백인 아이의 고발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문을 받고 망가진 아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데도! 어머니의 일을 보고 자신조차 그런 일을 겪었다면 두 번 다시 남자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것 같은데 티투바는 다시 또다시 연인을 만든다. 마음이 아름답거나 모습이 아름답거나 하는 단순한 이유들뿐 아니라 그저 이끌려서이기도 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어머니는 백인에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투바는 핍박받거나 공포에 질리거나 몸이 아픈 백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존 인디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티투바는 팔을 벌려 그들을 안았다. 만 야야가 은밀하게 알려준 기도와 비법으로 약을 만들고 죽은 이들을 불러왔다. 상처받은 아이들의 귀에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모든 선행은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몰약과 기도로 병을 씻은 자들은 이제 거짓으로 나뒹굴며 티투바를 마녀라고 고발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으로 향할수록 알게 되었다. 이 모든 비인간적인 일들은 다만 티투바가 진정한 마녀이기 때문이라고. 대지에 속한 자는 자연스럽게 사랑에 몸이 열리고 아프고 병든 자들을 품어 새롭게 피어나게 한다. 티투바는 땅에 피를 흘려 기도하고 죽은 이들과 대화하며 땅에 속한 것들을 꺾어 약을 만드니 그이야말로 대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록 그이가 처한 상황이 아프고 어두워 아이를 낳지는 못했지만 티투바야말로 대지다. 만 야야의 예언 - 넌 살면서 고통을 받을 거다, 많이, 많이, 하지만 넌 살아남을 거다,처럼 처참한 고통 속을 나뒹굴지만 그럴수록 티투바는 자연에 가까워진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티투바의 최후는 비참하다. 책임지지 않는 아이를 밴 만삭의 몸으로 어린 연인과 함께 잔혹한 조롱을 당하며 나무에 매달린다. 그러나 티투바가 올려다본 나뭇가지 위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발을 흔들며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죽음은 완전한 은혜고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일이라는 말이 이 광경 위에 겹쳐지면 마음이 아프다. 만 야야의 말처럼 검둥이의 불행은 끝이 없는 것일까. 인간의 세상에서 마녀가 인간의 몸을 입고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죽음이 해방이라는 뜻도 있는 듯하여 그이들처럼 자연의 원소들을 다룰 수 없는 미천한 인간인 나는 슬펐다.
티투바의 영혼은 한없이 자유롭다. 아픈 자들을 위로하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한 심성은 여전하다. 하지만 불과 피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가끔 쾌락이 필요하면 홀로 자는 남자의 침상에 깃들기도 한다. 육신을 벗어나 티투바는 진정한 자유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 여기 아직도 흑인이며 여성인 사람들은 억압당하고 고통받고 있다. 그들이 죽음이라는 완전한 해방 전에 인간의 몸으로도 조금은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도록 위대한 검은 마녀가 힘을 발휘하면 좋으련만! 그러기 위해 마녀는 작가의 상상에 깃들어 이렇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써 내려간 것일까. 그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