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은 왜 자기 얼굴을 그릴까 궁금해진다. 제 얼굴이 예술적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얼굴은 자기를 표현하며, 타자를 향해 제 속에 숨은 존재를 게시하는 영역이다. 얼굴은 삶의 이력이요, 저마다의 운명이고, 신에게서 받은 은총의 표지이다. 얼굴에 새겨진 상과 형으로 운명의 징후들을 읽어내는 비술도 있다. 욕망에 의해 주형되는 얼굴은 그 자체로 매우 경이로운 풍경이다. 한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얼굴은 열려있고 깊이를 얻으며 이 열려 있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자신을 보여준다. 얼굴은 존재가 그것의 동일성 속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이다."(에마뉘엘 레비나스)"
<자화상을 그려라> 중
스물다섯의 어린 엄마는 밤마다 잠을 못 자고 보채는 딸을 업고 집 앞 논두렁을 걸었다고 했다. 가로등도 없는 밤인데도 등에서 신열을 앓는 딸의 울음소리가 칼처럼 찔러서 무서운 줄도 몰랐다고. 팔삭둥이 병약한 딸은 잘 먹지도 잘 자지도 않았다. 끊임없이 울었다. 스물다섯, 아이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만 해도 힘이 드는데 그런 아이였으니 오죽했겠는가. 나는 늘 엄마에게 감사드린다. 버리지 않고 키워주셔서. 그것도 사랑으로 품어주셔서.
어지간해서는 잠들지 않는 딸을 재울 수 있는 비법이 딱 하나 있었다. 책을 읽어주는 일. 마르고 닳도록 한 이백 번 정도 읽어줬더니 세 돌 갓 넘은 아이가 그림책을 거꾸로 들고 책을 외우더란다. 글자를 모르니 읽는 것은 아닌데 귀신같이 페이지가 넘어가는 부분을 알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야무지게 장을 넘기더란다. 집안에 천재가 난 줄 알았으나 그냥 성장과정의 신비 정도였겠지.
아이는 자라면서도 몸이 약해 찬 바람을 조금만 쐬어도 열이 올랐다. 집에 갇혀 지내는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아이는 책과 놀았다. 부모가 모두 책을 좋아하여 아이에게도 책을 사주는 일은 아끼지 않았다. 뜨끈뜨끈한 이마를 작은 손으로 스스로 짚어 열을 가늠하며 해가 기우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었다. 혼자 읽기 심심하면 방바닥에 떨어진 햇빛 그림자에게 어눌한 발음으로 읽어주기도 했다. 햇빛은 바닥을 슬금슬금 기어가기도 하고 아이가 모르는 창밖 계절의 나무나 꽃 그림자를 데려와 보여주기도 했다. 아이의 책 읽기에 몽상이 덧대어졌다. 아이의 영혼에 어떤 무늬가 생겼다면 그 무렵이었을까.
불 켜는 것도 잊고 책을 읽었으니 눈이 나빠져 안경을 일찍 썼고 가뜩이나 납작한 콧대는 무거운 안경에 짓눌려 평지가 되었다. 지푸라기만큼 있었을지도 모르는 미모를 잃었으나 책 읽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심약하고 어리석었던 아이는 책을 읽으면서 고달프고 외로운 시간들을 빠져나왔다. 아니, 책을 읽으며 아이는 풍요로워졌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기쁨을 찾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책은 심해를 건너는 공기주머니. 책은 나에게 풍요로운 고요를 선물한다. 책 읽는 시간을 부레처럼 지니고서야 비로소 나는 완전해질 수 있었다.
작가에게 책은 어떤 의미일까. 은둔처에서 멀리 사람의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그만의 안경이 아닐까. 장서로 둘러싸여 고독의 생활을 이루었으니 그가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냥 먹고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책을 읽는 일이니 작가가 보여준 결기는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저 천연덕스러운 게으름뱅이인지도 모른다.
꼭 책을 읽으라고 사람들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행복을 모두 느끼리란 법은 없으니. 여행을 가든, 노래를 부르든, 그림을 그리든, 바느질을 하든, 그릇을 빚든, 쌀을 일어 밥을 안치든,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에게 살아있음의 실감을 안겨주고 더 먼 풍경을 열어 보여주며 내밀한 자신의 우물에 뜬 하늘을 완상할 시간을 선물한다면, 그래서 세상을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보고 숨겨진 나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면 충분하다. 공교롭게도 나와 작가에게는 그것이 책이었을 뿐.
그러니 무감한 삶을 살지는 말자. 시리고 아프더라도 생을 온몸으로 부딪으며 가자. 이렇게 바쁜 세상을 살다 보면 쉽게 감각이 퇴화된다. 세포가 죽기 않도록, 더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무언가에 '의식적으로 중독' 되자.
'살아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