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작고 뭉개진 발음으로는
사랑한다는 중얼거림이나 살려달라는 혼잣말도 엇비슷하게 들린다"
<유사인간> 중
꽃이 저무는 어느 날을 예감하며 초봄의 밤을 걷는다. 그러나 머리 위 눈부신 꽃은 너무도 천진하여 나는 그 꽃의 며칠 후를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젊은 아버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다 큰 아들이 있다. 무서운 시간이 그를 아버지의 나이로 데려간다. 송이째 벙긋 떨어진 꽃은 향기를 머금고 박제된다. 기어이 그날을 불러오는 마음은 어떤 색으로 멍이 들까. 목이 잠겨서 차마 부르지도 못하는 이름들이 장마철 채 걷지 못한 빨래처럼 젖어 처진다.
비가 내리고 시인은 어둑한 낮잠에 든다. 눅눅한 어둠이 사방 구석에서 기어 나오는 작은방의 잠은 불안하고 혼곤하다. 이윽고 날이 개고 시인의 잠도 그림자를 데리고 물러간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당에 나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 아래 무릎을 감싸 안고 가만히 앉는다.
시인의 시는 그 수건과 티셔츠와 속옷의 이야기. 비 내린 후의 비를 생각하는 마음.
나는 젊은 아버지를 배롱나무 아래 세우고 기어이 가까이 가지 못한 채 꽃이 지는 시절을 다 보내고 말았건만.
젊은 시인이 아름다워 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