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른 채로도 같은 책을 읽을 수 있지. 눈물이 나는 부분도, 웃음이 나는 부분도 서로 다른 채로도 우리는 그것을 알아가고 나눌 수 있지. 우리는 함께 읽으며 조용히 서로의 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지. 그랬다. 혼자를 유지하면서도 우리일 수 있지. 그게 정말 좋았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이, 책을 읽는다는 것과 같이 갈 수 있구나, 생경하고 좋았다."
<복희와 둥글게 공독회> 중
슬퍼하는 친구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 그것을 친구를 위해 백 원, 이백 원을 모은다고 말하는 사람. 왠지 이 사람은 혼자 길 위에 있다면 어디라도 머리카락을 흔들며 자그맣게 노래를 부를 것만 같다. 의외로 길 위에 혼자 있는 일은 흔하다.
나는 적적한 오후의 공기를 미지근하게 휘젓는 노랫소리를 생각한다. 흥얼거리는 소리는 목을 지나 코로 흘러나온다. 그건 손등 위로 맵시 있게 공깃돌을 올리는 일이기도 하고, 운동화 뒤축을 접어 신고 미끄러지며 달리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 맞는 죽음을 과자 상자에 담아 항구에 정박한 배들 사이로 떠내려 보내는 일이기도 하다. 승리이거나 만세이거나 혹은 무엇이거나 하는 이름들 사이로.
나는 이 곱슬머리 친구를 바라보고 싶다. 아니 눈을 감고 그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듣고 싶다. 어려서 불렀던 노랫말들은 어쩜 그리도 곱고 슬픈지. 아이들에 속한 것들은 어른의 것보다 더 짙고 깊고 아득하다. 어른이 되어 그것들을 매만지면 감정에 왈칵 목이 멘다. 그러나 어쩌면 이렇게도 다정하게 노래를 부르는지, 복희씨는. 복희씨는 마치 어린 시절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그것들을 들어 올려 요리조리 살피고 기뻐한다. 찬탄하고 이내 먹먹해진다. 희미한 기억을 뒤져 무언가를 길어올릴 때 나는 습관처럼 슬퍼지는데 복희씨에게 이 노래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 그런가 보다.
복희씨의 노래에는 기쁨도 쌉싸름한 슬픔도 묵지근한 깨달음도 모두 들어 있어서 매일의 풍경이고 흘러가버린 무엇이 아니라 늘 새로 태어나는 무엇이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사람은 참 아름답다. 복희씨의 글이, 시가 그렇듯이 들어보지 못한 복희씨의 노래도 그럴 것이다.
그런 복희씨가 부럽고도 예뻐서 나도 눈을 감고 소월의 노래를 불러 보았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