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by 별이언니

" 우리에게는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가 있다. 육의 세계는 좁고 얕은 반면으로, 영의 세계는 넓고 크다. 우리는 육의 세계에서 살아오지만 그 이상 영의 세계가 있음으로써 사람으로서의 사는 의의가 있다. 어디까지든지 무진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 영의 세계에서 노는 I, R, 사귄 I, R, 육의 외롭고 그리운 정을 가진 I, R, 영으로 맺은 우정이 이후 어느 모에 가서 그 피차의 생을 돕게 될지 누가 알리. "


나혜석 <나의 여교원 시대> 중


여성으로 사는 일은 여전히 지난하다. 왜일까. 인간 외 종이 모두 자웅동체는 아닐진대. 자궁을 가진 암컷은 높은 확률로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한다. 그건 사바나의 사자도 들판의 뱀도 대양의 고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 외 종에게서 이 임신과 출산, 즉 종을 번식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는 암컷은 종종 수컷보다 우위를 점한다. 수컷 거미는 방사를 끝내면 암컷 거미에게 잡아먹힌다. 이제부터 새끼를 기르고 낳아야 하는 암컷의 자양분이 되는 일이 그 순간 수컷 거미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벌과 개미도 무리를 이끄는 것은 모두 여왕이다. 무리를 지탱할 다음 세대를 잉태하는 일이 인간 외 종에게는 살아있음의 주요한 의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한복판에서 천적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명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인간들만이 생물학적 특징에 의식이 속박당해 차별과 혐오를 그치지 않는다. 성별, 피부색, 나이 등. 그건 이미 천적이 사라진 생물의 타락상인지도 모른다. 지극히 비효율적인 생식기능 - 긴 임신기간, 적은 수의 출산, 성체가 되기까지의 길고 지난한 기간 등- 을 가졌음에도 인간은 빠르게 증식하여 지구를 잡아먹고 있다. 송곳니도 발톱도 무디고 근육도 무른 이 허약한 생명체가 지구의 최상위 포식자가 된 것은 에르큘 포와로가 자랑하던 작은 회색 뇌세포 덕분이지만, 실체가 없는 것을 구현화하는 뇌세포의 저주는 이 생명체에게 권태를 선물하였다. 굶주림과 경계가 사라진 생물은 비틀린 공격성을 갖게 되었고 그건 다양한 형태의 학대로 표출되었다.


여성과 유색인종과 아이와 장애인, 힘이 있는 자들이 자신과 다른 개체들에게 보이는 잔혹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러니 약자들의 자기표현을 어떻게든 억누르고 싶다. 글을 쓰는 여성을, 그림을 그리는 여성을, 이혼 고백장을 쓰고 모된 감상기를 쓰는 날것의 언어를 지우고 싶다. 그러나 나혜석은 꺾이지 않았다. 그 시절에. 그 이후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여성에게 잔혹한 세계를 사는 나는 그의 언어를 만지며 슬프다. 망설임과 떨림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이 뜨겁다.


나혜석의 삶은 고통스러웠고 죽음은 비참했다. 우연히 살아남아 이곳에서 글을 쓰는 나는 그녀에 비하면 얼마나 운이 좋은가. 세상은 아주 조금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한 꺼풀 들춰보면 살기 힘들다. 그녀가 생전에 그렇게도 찬양했던 서양의 여성들조차 크게 운이 좋지는 않다.


인간을 망치는 것은 권태지만 인간을 살리는 일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며 존재에 대한 희구다. 작은 회색 뇌세포는 올바르게 쓰여야 비로소 아름답다. 길에서 떠돌다 행려병자로 죽을지언정 한순간도 '나, 나혜석'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던 사람.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지만 나는 한 인간이 온전한 자신으로 향하는 여행으로 읽는다. 그녀가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기 자신을 찾는 일에 몰두한다면 세상의 추는 균형을 되찾을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인간됨을 완성하기 위해 생명을 불태워야 한다. 그것은 고독한 싸움이 아니다. 손을 맞잡고 나아가는 연대다. 우리는 이제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 지구에 살아온 지 수만 년인데. 그동안 우리가 보아온, 우리가 저지른 대재앙을 지옥의 산처럼 쌓아올렸는데.


은하는 제각기 아름답고 우주는 평평하고 공명하다. 나는 평화주의자인 인간들이 영혼을 울려 텅 빈 우주를 가득 채우는 상상을 한다. 풀처럼 싱그러운 노래가.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최종 형태로 진화하는 일이지 않을까. 나는 가만히 연필을 들고 백지에 올린다. 숨소리를 가득 채운다. 나의 글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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