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밖으로 나갔더니 중세 때부터 수많은 사람이 걸어 다녔을 좁은 골목에 안개가 자욱했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멀리 앞쪽에서 거대한 뿌리 같은 형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게 대성당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내게 항로표지가 됐던 첨탑은 안개에 완전히 가려 있었다. 대성당이 바로 앞에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 뒤로 살라망카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항상 거기 첨탑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그 사실을 기억하는 한, 길을 잃을 염려도, 이게 꿈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없었으니까.
<오랜만에 살라망카를 떠나왔지만> 중
여행에는 설렘과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여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감정은 불안이다. 낯선 곳, 낯선 사람, 첨단 스마트폰과 론리 플래닛으로 무장해도 시시때때로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몰려온다. 여행 친구가 있다면 불화가, 혼자라면 긴장이 나를 집어삼킨다. 그 나라의 언어를 잘 모른다면 힘든 것은 배가 된다. 까막눈, 귀머거리에 벙어리가 되어 길을 헤매는 것은 예사요, 최악의 상황에는 발바닥까지 땀으로 흥건한 위험이 닥치기도 한다. 그렇다, 이건 다 나의 경험이다.
혼자 여행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니, 누군가와 여행을 함께 가는 것을 불편해하는 기묘한 성격인지라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곧잘 혼자 비행기를 탔다. 면허는 있으나 운전을 하지 못하니 어디를 가든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타이베이 외곽의 바닷가를 찾아가느라 버스를 탔다. 정류장은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아차, 하는 순간 나는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다. 사실은 지나친 것도 몰랐는데 옆자리에 앉은 친절한 분이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너 여행하는 사람이지? 그럼 너는 아마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쳤을 거야,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그곳을 방금 버스가 휙- 지나쳤다고.
서툰 중국 말로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하차벨을 누르고 뛰어내렸지만 여기가 어디고 나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 구글맵을 켜니 지나쳐도 한참을 지나쳤다. 빨리빨리- 운전기사님은 한국뿐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있는가 보다.
하는 수 없지, 당황한 마음은 빨리 포기했다. 양산을 펼쳤고 구글맵을 켰고 걸었다. 그냥. 한여름 땡볕 아래를. 땀이 속눈썹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정오에.
일사병 직전까지 갔지만,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지만, 팔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
그날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맥주를 마셨다. 해가 지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덤벙거리는 데다가 준비성도 떨어지는 나의 여행은 대부분 해프닝이다. 하지만 우연이 겹치며 늘 가장 근사한 기억이 생겼다. 세상의 어디든 나쁜 사람 반, 좋은 사람 반이고 나는 그중 좋은 사람들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희한하게도 일상생활을 하면서 쌓은 인간에 대한 회의감은 여행을 하면서 믿음으로 바꿨다. 아, 그래서 나는 주기적으로 여행을 가야 했나 보다.
하지만 역시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철저하게 이방인이 된다는 거다.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광장 한복판에 있어도 나는 고립되어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거품처럼 나를 에워싼다. 나는 가장 안전하고 동시에 가장 외롭다. 철두철미한 고독이 소라게처럼 나를 보호한다. 사람살이의 풍경 위를 미끄러지며 방관자가 되는 동안 내가 두고 온 나의 생활은 그립지 않지만,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면 아,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거구나,라고 쓸쓸하게 혼잣말을 한다. 떠나기 위해 돌아오는 것처럼.
언젠가, 아마도 다시 여행을 떠날 거라고 말하는 이 사람처럼.
그의 모든 여행은 지독히도 쓸쓸했으니, 그는 모든 여행지에서 작심이라도 한 듯 낯설었으니,
그 여행의 풍경은 너무나도 눈부셨다.
다시 가방을 꾸릴 때가 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