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by 별이언니

음,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해볼게.

우리 집엔 황토 쌀독이 하나 있어.

이른 아침, 어머니는 밥을 하려고 거기서 쌀을 푸곤 했는데,

그때 나는 어렴풋이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독 뚜껑 닫히는 소리가 좋았어.

그 소리를 들으면 살고 싶어졌지.

상투적인 멜로 영화 예고편, 그런 것을 봐도 살고 싶어지고,

아! 재미있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재치 있는 애드리브를 던질 때, 그때 나는 살고 싶어져.

동네 구멍가게의 무뚝뚝한 주인아저씨,

그 아저씨가 드라마를 보다 우는 것을 보고 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어.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여러 가지 색깔이 뒤섞인 저녁 구름, 그걸 보면 살고 싶어져.

처음 보는 예쁜 단어. 그걸 봐도 나는 살고 싶어지지.

다음은 막 떠오르는 대로 나열해 볼게.

학교 운동장에 남은 축구화 자국, 밑줄이 많이 그어진 더러운 교과서, 경기에서 진 뒤 우는 축구 선수들, 버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여자애들, 어머니의 빗에 낀 머리카락, 내 머리맡에서 아버지가 발톱 깎는 소리, 한밤중 윗집 사람이 물 내리는 소리, 매년 반복되는 특징 없는 새해 덕담, 오후 두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 말도 안 되는 성대모사를 하는 중년 남자, 내 상상의 속도를 넘어서며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전자기기들, 한낮의 물리치료실에서 라디오를 통해 나른하게 들려오는 복음성가, 집에 쌓인 영수증 ···

와··· 정말 많다, 그지? 아마 밤새워도 모자랄걸? 나머지는 차차 알려줄게.





상투적인 말이 떠올랐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오늘은 누군가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던 내일이었다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린다는 것이.


아름의 몸 안에는 너무 빨리 생겨 펼쳐지지 못하고 구겨진 시간들이 산다. 열일곱 아름의 시간은 남들보다 빨라서 신체 나이는 팔십이다. 조로증, 문학작품에나 있을 법한 병을 아름은 앓고 있다.


열일곱 살은 불안정한 나이, 대수와 미라가 아름을 낳은 나이다. 아름은 풋풋하고 설익은 사춘기의 열정이 살과 뼈를 입고 태어난 나이를 광속으로 지나가고 있다. 세상의 속도와 아름의 속도는 너무도 다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름은 모든 순간에 눈을 준다. 점점 흐릿해지는 세상을 마음으로 데려온다. 아름의 육체는 빠르게 늙어가지만 아름의 마음속 방에는 영원히 재생되는 계절들이 산다. 한 문장을 곱씹어 읽으며 오래오래 가시를 고르는 일은 한없이 느린 일이다. 아름이 하는 일들은 대체로 이렇게 느리다. 느리게 읽고 신중하게 쓰고 오래 생각하고 다시 듣는 일. 그래서 아름의 시간은 길다. 찰나를 재생하여 되풀이하니 아름이 사는 시간은 곱고 맑다. 사기꾼에게도 사랑을 알게 해줘서, 그 문장 속에서 너를 만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 만큼.


죽음의 순간에 가까워질수록 아름은 자신이 잉태된 순간을 기록하려고 한다. 여름에 한없이 가까워지려는 여름이 잉태한 아이, 아무것도 되지 않으려는 마음이 부딪쳐 빚은 생명. 머물렀던 모든 것이 자신을 떠나도 아름은 텅 빈 집이 되지 않는다.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에도 천진하게 묻고 싶다. 아빠, 어디예요? 어디쯤에서 쿡, 하고 웃은 거죠? 내가 기록한 아빠와 엄마의 열일곱이 마음에 드나요?


작가는 더없는 사랑으로 그 마지막을 써 내려갔다. 실제로는 고통스러웠을, 아름이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이 너무도 다정하고 따듯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마치 이 천사가 머물렀던 자리에 남은 금빛 흔적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러니 내가 부끄러울밖에. 나의 오늘을 아름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니, 얼마나 오만한 말인가. 아름의 하루하루는 가득했다.


신은 완벽한 존재라 감기도 앓지 않아 불완전한 인간을 모른다고 아름은 말하지만 그러기에 우리의 인생은 좀처럼 평온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늙어가고 약해지며 우리는 스스로의 불완전함으로 좀 더 고결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하나하나 충만하고 귀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열일곱 아름의 몸속에 가득 찬 시간들이 펼쳐져 비로소 안온해지면 너무 빨리 잃어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오래 멀리 걷기를.


잘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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