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어금니 깨물기

by 별이언니

엄마가 요양원에 입소하시던 날, 나는 빨간색 천 커버와 가름끈이 멋들어진 공책 한 권을 선물로 드렸다. 잊지 않고 싶은 게 있을 때에 사용하시라고 했다. 동네 산책을 할 때에도 자그마한 수첩 하나 정도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내가 무언가를 메모할 종이 정도는 인간의 필수품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지만, 엄마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이었다. 엄마는 단 한 번도 그 공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책인 줄 알고 고이 침대 옆에 꽂아놓기만 했다고 전해 들었다. 요양원의 스태프들도 그것이 엄마에게 소중한 사연이 있는 책인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첫 번째 면회를 갔을 때에 아주 뿌듯한 표정으로 내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는 두 통이었다. 하나는 입소하기 전날 밤에 쓴 것인데 망설이다가 못 건넸던 것이고, 하나는 내가 면회를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썼다고 했다.

<편지 두 상자> 중




한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어금니를 깨무는 인간은 강한 사람인가. 잔잔하지만 무언가 악물고 견디는 듯한 문장에 다다를 때마다 생각했다.

이 년 전 나는 발톱을 뽑았다. 새벽에 강아지가 짖었고 잠결에 뛰어가다가 문턱에 발톱을 부딪혔는데 운이 나빠서 그랬는지 깨져버렸다. 발톱을 붕대로 둘둘 감고 병원에 갔다. 의사는 발톱을 뽑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진료실 문을 닫고 간호사 두 명이 내 어깨를 잡았다. 마취주사가 더 아프니 그냥 생으로 뽑자고 하며 의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소리 질러도 됩니다, 울어도 돼요. 간호사가 나보다 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둘둘 말은 담요를 하나 주고 입에 물 거즈도 주었다. 나는 거즈를 입에 물고 담요를 끌어안았다. 발톱은 생각보다 잘 뽑히지 않았다. 나보다 의사가 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계속 당부했다. 소리 질러도 됩니다, 울어도 돼요.

나는 작은 아-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식은땀으로 속옷까지 흠뻑 젖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소리 질러도 되지만, 울어도 상관없지만 왠지 소리를 내면 무너질 것 같았다. 견뎌야 하는 순간이라면, 고통으로 영혼이 하얗게 바래가는 순간에도 나는 차갑게 생각했다. 견뎌야 하는 순간이라면 견디겠어.


인생의 모든 순간을 그토록 큰 각오로 맞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삶의 자세는 어금니를 무는 일과 같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순간을 지나오기 위해, 여기 - 지금 숨을 쉬며 머무르기 위해. 어금니를 지그시 무는 일은 고요하지만 열렬한 일. 복잡하게 금이 간 거울을 들여다보며 길을 잃은 표정을 찾는 일. 맥을 풀고 바다를 떠돌아도 흠뻑 젖어 해안으로 되돌아오는 일. 우리는 자주 이를 악물고 자주 소리 없이 견딘다. 창틀에 올려놓은 꽃잎을 손톱으로 들어 올린다. 결을 따라 바스러지는 향기를 따라간다. 가장 슬플 때, 가장 무기력할 때,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심장은 가장 뜨겁게 뛴다. ​


시인은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어느 시간을 내려놓는다. 돌처럼 종이 속으로 가라앉는 시간들. 나는 창백한 백지 속을 어룽거리는 시간을 읽는다. 견뎌야 한다면, ​


아니, 그것은 가장 열심히 산 어느 시간. 새로 돋은 발톱에 뜬 희고 얇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