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리 랑그바드, 그 여자는 화가 난다

by 별이언니

여자는 자식을 입양시키는 일이 평생 떨쳐버릴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는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조 솔은 <입양 치유>에서 자식을 입양시키는 일은 자식을 납치당하는 것에 견줄 수 있다고 말했다. 가게에서 쇼핑을 하던 중 자식이 납치당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여자는 그 상황에서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 경험을 하고서도 어느 정도 정상적인 감정과 느낌을 바탕으로 삶을 지속할 수 있다면 행운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자식이 납치당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그와 같은 일을 당한 후 얻게 되는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수많은 시간의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러한 심리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은 여자의 어머니처럼 될 것이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여자는 자신을 입양 보냈던 어머니를 책망할 수 없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여자는 어떤 면에선 자신에게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까?





여자는 화가 난다. 피를 나눠준 부모에게, 양육을 전담한 양부모에게, 친구에게, 애인에게, 입양을 보낸 국가에, 입양을 받은 국가에, (여자에게 모국이란 어디일까? 이렇게 쓰고 나는 멈칫한다. 모국, 어머니의 나라. 여자의 혼란과 여자의 분노가 나를 두들긴다. 나는 결코 온전하게 여자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이런 나에게 여자는 역시 화가 날 것이다.) 이 모든 자궁에게, 생명에게, 여자는 여자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했다. 여자의 분노가 너무 아파서 나는 자꾸 멈칫거렸다. 여자는 이런 나에게 화가 나겠지.​


국가 간 입양. 어렸을 때 tv에서 해외입양에 대한 일들을 종종 보고는 했다. 친부모가 '버린' 아이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선진국'에 보낸다고 했다. 강보에 싸여 팔에서 팔로 넘겨지는 아기들이 아닌, 공항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다. 저 아이들은 한국말을 조금이라도 하니까, 한국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니까. 하지만 테드는 8살에 입양을 갔는데도 한국말을 모조리 잊었다고 했다. 그는 서강대에서 한국어를 다시 배우려 했지만 답답하게도 늘지 않았다고 했다. 한국어를 써서는 안됐던 어린 시절이 그의 혀를 무겁게 짓누르는 건지도 모른다. 입양을 간 나라에서 빨리 적응하기 위해 그는 '모국어'를 버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였던 그가 '생존'하기 위해서. 난 얼마나 폭력적인가. 멈칫거리며, 두려움으로 표정이 사라진 아이들이 출국 게이트로 사라지는 모습을 tv로 멍하니 바라만 봤던 나는. 막연히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로 가야 한다니, 하며 괜히 손을 쥐었다 풀었다 했던 나는. ​


그 아이들이 돌아왔다. 어른이 된 후 나는 친부모를 찾는다는 말조차 통역이 없이는 전하지 못하는 그때의 아이들을 다시 tv로 보았다. 마야처럼 그들은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외입양아들을 위한 다큐멘터리, 때때로 아침 프로에서 그들은 혼란스럽고 불편한 얼굴로 친부모를 찾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말이 입술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후회하는 표정으로. 정말 찾고 싶을까, 바라보는 나도 혼란스러웠다. 엄마는 옆에서 덤덤히 말씀하셨다. 피는 당기는 법이다. ​


완벽하게 행복한 이방인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들이 마침내 찾은 친부모와 상봉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불편함은 절정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표정들이 기억난다. 후회하는 표정, 달아나고 싶은 표정, 화가 나지만 동시에 슬프고 그 이율배반적인 감정의 부침이 버거워서 그만 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고 싶은 표정이. 울면서 자식을 끌어안지만 부모의 표정도 역시 이상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우는 걸까.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아이를 만난 벅참?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아이의 유년 시절을 상상하며? 아니면, 아이를 입양 보냈어야 하는 과거의 스스로가 애달파서? 폭풍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휘청이면서도 그들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


마야는 화가 난다. 친부모가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판단해서 아이를 바다 건너 먼 나라로 돈을 받고 보내는 '입양사업'에 대해서. 입양사업의 저변에 깔려 있는 '서방 선진국'과 '동양의 가난한 나라'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 아이를 입양해서라도 꼭 아이를 가져야겠다고 결심하는 어떤 마음들에 대해서. 혹은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부모가 '버린' 아이를 구원한다는 마음으로 아이를 입양하는 행위에 대해서. 왜 그것이 꼭 아이를 친부모로부터 떨어뜨려놓는 일로 이어졌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사회안전망의 구멍으로 떨어진 아이들의 마음에 대해서. 그렇게 멍들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분노'에 대해서. 여자는 계속 화가 난다,고 말한다. 화는 뜨겁게 달린다. 나는 감히 여자의 화를 안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귀를 활짝 열고 묵묵히 여자의 화를 들었다. 노래처럼 이어지는 여자의 분노를. 차갑게 피부 위를 달리는 불꽃을. 그리고 계속 생각했다. 어이구 어이구 통곡을 쏟으며 얼싸안는 친모 혹은 친부를 마주 안지 못하고 굳어버린 그들을. 그들의 그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


그건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


뿌리라던가 정체성이라는 단어에조차 화가 나는, 어떤 감정. ​


피상적인 이해에 그치지 말고, 여자의 화를 따라가보자. 우리에겐 그럴 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