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선 에세이 <백석이라니>

by 별이언니

2022년은 호랑이의 해다. 꽃과 호랑이는 설핏 들으면 어쩐지 어울리지 않게도 느껴지지만 그 어떤 호랑이에게도 '꽃의 시절'은 분명히 있을 것이며,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한 시절은 '꽃'처럼 살아가는 때가 있다. 그 시기는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어느 인생이건 그 시절은 꼭 있고, 기필코 있어야만 한다. 따뜻하게 이름을 불러 주는 상대가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나다워지는 그 시간 말이다.

<내 이름에 새긴 너의 다정이라니 - 통영 김춘수 유품전시관> 중




통영은 눈이 닿는 곳마다 시가 넘쳐흘렀다.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공원에서 나는 손가락을 활짝 펼쳐 무지개색으로 칠해진 벤치 위를 팔락팔락 나는 나비 시늉을 하였다. 손가락과 손가락 그림자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닮은 시가 언덕에서 바다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내가 아는 어느 도시도 이렇게 문학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견문이 짧은 사람은 이렇게 뒤통수를 맞고야 만다. 세상에 이렇게나 많이 문학을 머금은 장소들이 있다니. 그리고 그곳에 이렇게나 큰 경외심을 품고 찾아가는 이가 있다니. ​


첫아이가 깃든지 얼마 되지 않은 소설가는 조심스레 무진을 찾는다. 거기엔 우리를 설레게 했던 안개가 있다. 안개가 피어난 갈대숲을 걷던 김승옥 선생은 임신 소식을 듣고 입을 열어 "좋다!"라고 말씀하셨다. 단단하고 맑은 소리. 그 부름을 붙잡고 어여쁜 아이가 태어나고 소설가는 다시 태어난 아이를 안고 춘천으로 봉평으로 청운동과 제주로 기억을 찾아간다. 기억을 머금고 있는 어떤 문장을 찾아간다. 순전히 텍스트를 향하고 텍스트를 사랑하는 여행이라니. 나는 그녀의 탄성을 고스란히 받아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이런 순정이라니. ​


가볼 곳이 생겼다. 가서 고즈넉이 머물 어떤 문장들이. 새록새록 소금빛으로 피어나고 푸르게 울 문학이. 우리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는 영구동토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빙결된 상처는 잊지 않고 고스란히 기억하는 인간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에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된다. 가을이 바람을 데려오면 소나기처럼 나도 떠나야겠다. 위로받기 위해서 치유되기 위해서 그리하여 다시 쓰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