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산호 <너를 찾아서>

by 별이언니

자해는 그럴 때 하는 최후의 저항이었다. 엷은 피부에 칼날을 대고 힘을 주어 핏방울이 송글송글 돋아날 때면 폭발하는 통증과 함께 아직은 살아 있다는 자각이 일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무의식적으로 정한 마지노선이기도 했다. 죽고 싶은 마음을 마지막 순간에 잡아 주는 경계선. 어쩌면 자해는 소리 없는 절규이자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동아줄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모가 비싼 상담료를 치러 가며 매주 억지로 만나게 하는 상담치료사는 다른 해석을 내놓겠지만.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기억은 그릇에 담긴 물과 같아서 거기 담긴 물상은 그릇의 모양에 따라 일그러진다. 그릇이 놓인 장소에 따라 쉬이 마르거나 곰팡이가 피기도 하고 날씨에 따라 데워지기도, 얼어붙기도 한다. ​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모두 사라진 기억을 좇는다. 기억과 함께 사라진 소중한 사람을 찾는다. 한 토막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만큼의 인생이 지워진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우와 선우, 아난에게는 단순히 물리적인 분량의 상실이 아니다. 분명 비가 내리던 어느 밤의 몇 시간이 사라졌는데 그 이후의 삶이 모두 흔들렸다. 기억이 담긴 그릇이 찌그러지고 선반은 흔들려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남았다. 연우가 팔과 다리에 수없이 긋던 카터 칼처럼, 그들의 삶에는 이후 계속 검은 비가 내린다. ​


인간은 깨진 거울 조각의 바다와 같다. 거기 비치는 표정은 헤아릴 수도 없어서 평범한 우리의 왼뺨은 선하고 오른뺨은 추하다. 그건 사고였지만 어린아이는 잠겨진 집안에 홀로 남겨졌다. 그건 사고였지만 아랑에게 향하던 그 순간의 적의와 분노는 사고가 아니었다.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그건 사고였다. 그건 사고가 아니었다. ​


그건 오해였지만 대리복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은 교묘하여 한 짓과 하지 않은 짓의 저울추를 맞춘다. 불길 속에서 서로를 갈망하는 듯 함께 타오른 남녀처럼. 서로 다른 마음의 저울이 수평을 이루듯.​


이야기였기에 가능했다. 현실이라면 더 복잡하고 치열했을 것이며 잔인하고 어두웠을 테지만 친절한 이야기꾼은 추 하나를 내려놓고 추 하나를 올린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 분노와 의심을 거두고 대가를 치르게 하며 복수는 어떠한 이유로든 향긋할 수는 없다는 교훈도 남긴다. 균형감각이 탁월하다. 숨겨져 있는 비밀조차 있을 법한 무엇이라 안심이 된다. 너무 극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평범하지도 않은 이야기는 꼭 벽 너머 내가 모르는 누구의 사연인 듯도 하여 숨을 죽이고 따라가게 된다. 나의 앞집엔, 옆집엔 대체 어떤 기억이 출렁이고 있는가. 그 기억을 담은 그릇의 모양과 온도, 습도는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