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by 별이언니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종이는 손수건 - 도무지 손바닥만 한 평화

종이는 신의 얼굴 - 세상을 통째로 구원할 재능 없는 신의 얼굴

삼류 신, 어린 시절부터 싹수가 노랬던 신

할머니가 발가락처럼 거친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이 먹었는데 절망해도 되나

죽을 때까지 절망해도 되나

차창 밖에다 물었다

검은 상자를 칸칸이 두드리며 물었다

기차 바퀴가 끽끽, 마찰음으로 울었다

멈추는 것들은 대개 그렇듯, 슬프거든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 중



스포츠 브랜드의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정수리에 돋은 흰머리를 뽑는다. 무딘 손가락은 자꾸 흰머리 말고 주변에 난 검은 머리카락을 뽑는다. 흰 머리카락은 뽑으면 모공이 근질근질 시원하다. 근질거리는데 시원한 감각을 안다는 것, 그건 정수리에 흰 머리카락이 난다는 것.​


마음이 도통 늙지를 않는다는 것. 질긴 심장이 뜨겁게 두근거리는 것. 몇 달 전에 다친 어깨가 낫지 않고 오늘은 통증이 팔꿈치까지 내려온다. 언젠가부터 매일 보는 신문인데도 마치 되감기는 시계처럼 똑같은 비극을 보는 것 같다. 비극은 몇란성 쌍둥이인가. 아니 모든 비극은 같은 자궁을 빌려 태어나는가. ​


귀를 기울이면 사랑은 여전히 거기 있고 손을 오므렸다 펴면 텅 비어있다. 녹슨 파이프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순환하는 피. 아무런 힘도 없는 늙은 왕을 바라본다. 종이 위의 신 - 시라는 검은 신. ​


조약돌을 던져도 아무 반응이 없는 철옹성 같은 세계를 바라보며 시인은 시를 쓴다. 통곡의 벽을 더듬듯 시를 쓴다. 기도를 올리듯 축문을 쓰듯 시를 쓴다. 시라는 신을 섬겨도 냉혹한 우주의 자궁은 비극을 낳는 일을 멈추지 않고,​


흰머리를 뽑으며 거울 속에 비친 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사랑을 단념하면 이대로 돌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별의 분화구에서 아름다운 문장을 길어올려도 장미는 목이 마르고​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 시를 쓰는 일, 시를 읽는 일, 어떤 이름을 반복하는 일, 길 위에서 골방에서 적적한 골목에서 질긴 심장을 움켜쥐고 아아,​


진은영의 새 시집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