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베운자가 더 당황한 부분이 있었다. 모든 업무를 온라인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증권사는 왜 굳이 지점을 운영할까? 밥은 이렇게 답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예요. 제가 누군가에게 복잡한 무언가를 설명해야 한다면 전화로 설명하기 싫거든요. 상대가 내 말을 이해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증권사 지점은 사회적 공간이에요. 남들의 대화도 엿들을 수 있어요. 시장이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어요. 지루해질 때도 있고요. 또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사실 밥은 이런 사회적 소통을 매우 중시해서 트레이더를 어디에 앉히느냐는 다소 고리타분해 보이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심했다. "저는 트레이더들을 최대한 많이 순환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다들 저항해요. 경험상 보통 주변에 있는 사람들하고 얘기하거든요. 저에 대해 불평하고 그러면서 서로를 알아가죠. 서로 모르던 사람들이 친해질 만큼 가까이 앉히지만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할 정도로 오래 같이 있게 하지는 않는 게 요령입니다."
확증편향의 위험성에 대해서 의외로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지식인 계층에서 이 문제는 더욱 두드러진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알기 때문에 자만하는 것이다. 나의 렌즈에 얼룩이 묻어있을지도 모른다는(이것은 누구에게나 100% 적용되는 사실이다) 합리적 의심을 품고 세계를 바라보는 겸허함이 그들에게는 부족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확정적인 말투를 경계한다. 확신에 찬 단정을 내리는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 확증편향이 극으로 치달으면 아우슈비츠가 있다. 알고 있다는 착각은 이것이 세계의 정의이자 진리라는 자기 확신이 된다. 자기 확신의 감옥에 갇힌 자는 자유롭지 못해서 폭력적이다. 그가 권력을 가진 자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 되는 순간 확신은 배척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경계가 생기고 경계 너머의 인간이 모두 적이 된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휴대전화를 들고 sns에 접속하는 순간 내가 갇힌 감옥을 알 수 있다. 문명이 생긴 이래 어느 시대도 이 저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겠지만 지금의 세계만큼 '적이 있어서 살아있는 실감을 느끼는 아이러니' 인 적도 드물지 않을까.
인류학자는 편견 없이 관찰하는 자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학자에게 당연한 것은 없다. 아마존 밀림에서, 중앙아시아의 오지에서, 아프리카의 원시부족 마을에서 인류학자는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며 바라봐왔다. 그러나 2-3년 주기로 팬데믹이 선포되고 전 세계가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지금의 시대에 인류학자는 그곳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혐오하던 월스트리트의 심장에, 불신하던 언론사의 데스크에, 상호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고 여겼던 IT 기업에 그들이 있다. 혐오와 불신과 몰이해를 깨뜨리기 위해. 금융과 저널리즘과 첨단 기술이 인간을 배제하는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보자 그곳에는 놀라울 정도로 한심하고 편협한 일들이 넘쳐났다. 결국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모든 것은 인간에게 흘러드는데 비커를 흔드는 미치광이 과학자의 독단만 남아있다. 관점만 살짝 비틀었을 뿐인데 아무리 애를 써도 이유조차 알 수 없었던 문제들이 해결이 되는 사례들을 보며 착잡했다. 서로를 사랑하는 데에는 이를 수 없겠지만 적어도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생각보다 우리가 갇힌 인식의 감옥은 견고했다. 생물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연한 자기 보호지만 인간은 약육강식으로는 결코 종을 보존할 수 없다. 인간의 문명은 교류를 통해 진화해왔다. 네트워크가 없다면 인간은 몇백만 년 전에 멸종했을 것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 것. 인류학자의 렌즈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누구도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에 인류학자인 저자 또한 트럼프의 말실수에 웃음을 터뜨린다. 다만 자기 행동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반성하는 것이 다르다. 우리 모두의 렌즈엔 얼룩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력이 필요하다. 모험심이 필요하다. 끈질긴 관찰력이, 겸허한 자기반성이, 필터 없는 경청이 필요하다. 어려운 일이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다. 우리의 손에는 돌도끼나 칼보다 위험한 무기가 쥐어져 있고 얼룩져 보이는 대상에 대한 혐오가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을 부를 수 있다. 아마존 오지보다 더 복잡하고 다양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의무다.